계약조건과 불공정약관

김앤장 법률사무소 공공계약팀 변호사 김태완



잘못된 약관의 파국

1. 잘못된 약관의 파국

 법원은 2016년 보험금 지급에 관한 소송에서 약관에서 정한 일정 사유의 자살에 대해서는 보험사가 보험금을 지급해야 한다는 선고를 한다. 이 판결로 인해 보험사들이 지급해야 할 잠재적 보험금의 액수는 무려 1조원에 달한다고 보았다. 당시 대법원이 자살도 ‘재해’에 해당한다고 판단하거나 자살에 대한 사회적 정의나 개념을 달리하게 되어 내린 판결은 아니다. 그럼 왜 대법원은 천문학적 액수에 달하는 보험금 지급책임을 인정한 것일까. 사건의 발단은 잘못된 약관을 반복적으로 쓴 보험사들의 과실에 있었다.

 보험사들이 2001년부터 2010년까지 판매한 보험상품의 ‘재해특약’에는 “보험계약의 책임 개시일로부터 2년이 지난 이후 자살을 한 경우에는 보험금을 지급한다”는 약관조항이 들어가 있었다. 재해사망보험금은 일반사망보험금보다 2~3배가 더 많다. 아이러니하게도 위 재해특약의 포함은 한 대형 보험사가 잘못 기재한 약관을 다른 보험사들이 그대로 베껴 쓰면서 벌어지게 된 일이다. 오류를 발견하기까지 10년이 걸렸고 2010년 4월 이러한 오류를 알게 된 보험사들은 재해사망 보험금 지급대상에서 자살을 제외하는 것으로 부랴부랴 약관을 개정한다. OECD회원국 중 우리나라가 자살률 1위라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위 재해특약 보험에 가입하였던 자살자들의 유가족들은 약관에 따라 보험금을 청구하였지만 보험사들은 해당 약관이 오류라며 ‘재해사망보험금’을 지급하지 않았다. 실수는 인정하지만 자살은 명백하게 재해가 아니라는 주장을 함께 하였다. 급기야 금융감독원은 이러한 사실을 적발하고 보험사들에게 그 동안 미지급한 보험금을 지급하라고 시정명령을 내린다. 삼성, 교보, 한화, 신한, ING생명 등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대형 보험사가 모두 포함되어 있었다. 금융감독원의 지급 명령에도 불구하고 보험사들은 약관 자체의 무효를 주장하며 보험금 지급을 거부하였고, 그 판단은 사법부의 몫이 되었다.

 법원도 하급심에서는 판결이 나뉘어졌다. 1심에서는 보험금 지급의무를 인정하는 판결이 나왔지만, 2심에서는 반대의 결론을 내렸다. 대법원은 결국 엇갈린 판결을 정리하면서 “보험사들은 약관에 정해진 대로 보험금을 지급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대법원 판결로 인해 당장 지급해야 하는 17개사의 보험금은 200억원 정도로 추산되었지만 소송에 참여하지 않은 잠재적 보험금까지 합하면 약 1조원에 육박할 것이라고 보았다. 소송을 지켜 본 금융감독기관의 관계자는 “보험금 지급시에는 약관을 불변의 기준처럼 삼으면서, 불리한 경우에는 해당 약관이 실수라고 주장하는 보험사의 이중성이 사건의 본질이다”라고 말하였다.

약관에 대한 통제

2. 약관에 대한 통제

 약관은 명칭이나 형태를 불문하고 계약의 일방 당사자가 다수의 상대방과 계약을 체결하기 위하여 통일된 형식에 따라 사전에 마련한 계약내용을 말한다. 은행, 보험, 신용카드, 전기, 가스 등 수 많은 소비자와 거래하는 사업 유형의 경우 사업자와 소비자가 일일이 흥정하여 계약내용을 결정하고 반영한다면 상당한 불편과 시간이 소요될 것이다. 이러한 불편을 해소하기 위한 방안으로 마련된 것이 약관이고, 결국 수많은 소비자와의 거래 편의를 위해 사전에 마련된 계약서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다. 보험약관, 카드약관, 이용약관 등 우리가 일상에서 수없이 접하는 깨알 같은 부동문자들이 바로 약관이다.

 법원은 약관이 계약당사자 사이에 구속력을 갖는 것은 그 자체가 법규범의 성질을 가지기 때문이 아니라 당사자가 그 약관을 계약 내용에 포함시키기로 합의하였기 때문이라고 본다(대법원 1998. 9. 8. 선고 97다53663 판결). 따라서 계약당사자 일방이 명시적으로 약관의 규정과 다른 내용을 약정하였다면 약관의 구속력을 주장할 수 없게 된다. 그러나, 현실에 있어서 대부분의 약관은 수정이 불가능한 부동문자로 인쇄되어 있고 사업자가 일방적으로 제시한 소위 ‘동의’ 란에 체크만 할 수 있는 형태를 가지고 있다. 심지어 전자거래의 경우 ‘동의’에 체크하지 않으면 더 이상의 거래는 진행되지 않는다. 그래서 문제되는 것이 불공정한 약관에 대한 통제이다.

 「약관의 규제에 관한 법률」은 불공정한 약관으로 인한 계약상대방의 피해와 불이익을 구제하기 위해 불공정 약관에 대한 다수의 통제 장치를 규정하고 있다. 신의성실 원칙에 반하는 불공정 약관 조항은 무효이며, ① 상대방에게 부당하게 불리한 조항, ② 상대방이 예상하기 어려운 조항, ③ 본질적 권리를 침해하는 조항 등에 대하여는 불공정 약관으로 추정하고 약관이 계약의 내용으로 편입된 후에도 이를 무효로 할 수 있다. 원칙적으로 무효인 약관을 제외한 나머지 계약은 유효하게 존속하지만, 유효인 부분만으로는 계약의 목적 달성이 불가능한 경우 그 계약은 전부 무효가 된다. 어떠한 약정이 ‘약관’에 해당한다는 인정을 받는 근본적인 실익은 이처럼 해당 약정이 권리를 침해하는 불공정한 약관인지, 부당하게 불리한 약관인지를 공정거래위원회 등을 통해 심사받을 수 있는 방어수단을 갖는다는 것이며, 불공정한 약관의 계약에의 반영을 사전 차단할 수 있는 통제 장치를 갖는다는 것이다.

공공계약조건과 약관

3. 공공계약조건과 약관

 국가나 지방자치단체와 체결하는 계약은 원칙적으로 사인간의 대등한 지위에서 행하는 사법상 계약이라고 보고 있다. 따라서, 국가나 지방자치단체가 민간기업과과 거래행위를 하는 경우에는 독점규제법 또는 약관규제법의 적용 대상인 사업자에 포함된다고 보고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공적 기관이 불특정 다수의 계약상대방과 거래하는 편의를 위해 사전에 만들어 놓은 약정을 계약조건으로 사용하고 있다면, 그리고 이와 다른 약정의 반영이 현실적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면 이 역시 약관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최근 공정거래위원회는 지방자치단체의 택지공급계약서를 약관으로 인정한 바 있고, 신축공사의 감리용역을 위해 반복적으로 사용한 과업지시서를 약관으로 인정하여 그 일부 조항에 대하여 시정권고를 내린 바 있다. 아직 일반화되었다고 볼 수 없지만 공적 기관의 계약문서 역시 약관 통제의 대상이 될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만약 계약상대방에 대한 권리침해 사항이 법률적 근거가 없음에도 계약당사자간의 합의라는 명목 하에 반복적으로 계약내용으로 편입되고, 그 수정이 쉽게 허용되지 않는 불합리한 사항이 있다면 때로는 약관에 관한 통제 법리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