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은 저작권의 사각지대

 신학기만 되면 대학 캠퍼스 주변은 뜨거워진다. 젊은이들의 사랑이나 봄기운이 아니라 대형 복사기에서 나오는 열기 때문이다. 학생들은 두꺼운 교재를 통째 복사집에 맡기고, 업소는 밤새 기계를 돌려 산뜻하게 제본한 책을 공급한다. 학생들은 남의 저작권 침해는 아랑곳 없이 책값을 아꼈다는 뿌듯함 속에 복사본을 옆구리에 끼고 다닌다.
 근래에 와서도 이런 풍속도는 이어지고 있지만 성격은 달라졌다. 정부와 권리자 단체가 후진국의 징표나 다름없는 대학가 불법복제를 지속적으로 단속하고 합법적 이용을 유도한 결과다. 업소들도 저작권 보호의 취지를 받아들여 1,200여 곳이 계약을 체결했다. 복사는 1면당 5원, 전송의 경우 도서 및 학위논문은 1면당 10원, 정기간행물은 10면 기본료 500원에 추가 1면당 10원 선이다.
손 수 호  교수
손 수 호 교수
(인덕대 교수, 국민일보 객원논설위원)
 
 이같은 계약이 가능한 것은 복사기라는 기계가 가진 속성 탓이다. 1938년 10월 미국의 칼슨이 발명하고, 1950년 제록스로 상품화한 복사기는 유사 이래 늘 무언가를 카피(copy)함으로서 자신의 존재이유를 증명해 왔다. 공(空)테이프가 허공을 녹음하지 않듯이, 흰 종이를 복사할 얼간이가 어디 있겠는가. 복사의 대상은 대부분 글이다 보니 복사기와 저작권는 피할 수 없는 대결 상대다.

 규범은 지혜롭게도 개인의 영역과 공중의 영역을 구분하고 있다. 저작권법 제30조는 "공표된 저작물을 영리를 목적으로 하지 아니하고 개인적으로 이용하거나 가정 및 이에 준하는 한정된 범위 안에서 이용하는 경우에는 그 이용자는 이를 복제할 수 있다"고 규정해 놓고 "다만 일반 공중의 사용에 제공하기 위하여 설치된 복사기기에 의한 복제는 그러하지 아니하다"는 단서를 달아놓고 있다. 대학가의 복사업체들이 권리자단체와 계약한 것도 이 단서 조항을 적용한 결과다.

 문제는 공공기관과 기업이다. 대학가의 불법복제는 지역이 특정되어 있고, 신학기라는 시기에 집중되어 있으니 단속이 쉽지만 공공기관이나 기업은 보안시설이 갖춰진 사무실 안에 복사기를 두기 때문에 접근 자체가 쉽지 않다. 저작권보호센터에 단속권한이 있긴 해도 영장 없이 적발에 나설 겨우 주거침입이라는 법익과 충돌한다. 이로 인해 전국에 보급된 복사기 40여 만 대에서 생기는 불법복제의 피해액은 2,000억원대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사정이 이런데도 공공기관과 기업은 이용계약을 꺼린다. 어떤 기업은 공중용 복사기를 수십대 가동하면서 타인의 저작물을 집단적이고 반복적으로 이용하면서도 타인의 권리를 침해한다는 인식조차 없다. 돈 주고 복사기를 구입했으니 복사에 이용하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니냐고 생각하는 부류도 상당하다.

 그나마 다행스런 것은 느리게나마 저작권을 존중하는 곳이 늘어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문화체육관광부, 국립박물관이나 도서관이 계약을 체결한 것은 업무의 특성상 그렇다 쳐도 최근에 국무조정실이 참여한 것은 무척 고무적이다. 연간 20만원이라는 액수보다 공공기관의 상징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각별하다고 하겠다.

 기업쪽은 명함 내밀기 조차 쑥스러운 수준이다. 유한킴벌리, 풀무원 등 윤리경영을 표방하는 곳이 동참하는 정도다. 기업들은 이용료에 예민한 반응을 보이고 있으나 명세서를 보면 그렇게 부담스러워할 수준은 아니라고 본다. 복사기 숫자에 관계없이 무조건 연구직은 1인당 5,000원, 사무직은 1,000원, 기술직은 500원이라고 하니 종업원 100명 규모에 10%의 연구직과 사무직이 있다면 한 해에 10만원 안쪽이 나온다는 계산이다.

 공중용 복사기 이용 계약은 글로벌 환경과도 맞물려 있다. 미국 등과의 FTA 체결로 권리보호의 필요성이 커지고 있는 데도 국내에서 법외지대에 머물고 있는 것은 상호주의의 원칙에도 어긋난다. 어문저작물에 대한 복사권을 신탁관리하는 미국 저작권처리기구(CCC)는 6,000여 기업, 일본의 복사권센터(JRRC)는 4,000여 기업체 및 공공기관과 계약을 체결했다고 한다.

 적법계약은 국내 문화산업의 발전을 이끌 교두보라는 점도 중요하다. 실제로 저작권 제도가 국내 음악산업의 발전을 뒷받침 됐듯이 공중용 복사기를 쓰는 기관과 단체, 기업에서 어문저작물 보호에 나선다면 침체에 빠진 출판산업을 일으켜 세우는데도 큰 힘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