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부기고

img

시험문제의 저작물성에 대한 법원의 태도는 분명하다. 대법원은 1997년 11월 “질문의 표현이나 제시된 여러 개의 답안의 표현에 최소한도의 창작성이 인정된다면 저작권법에 의해 보호되는 저작물로 보는데 지장이 없다”고 판시했다. 서울동부지법도 2009년과 2010년 의사와 간호사 국가시험에 나온 문제를 모아 책으로 펴낸 뒤 일반에 판매한 출판업자에게 복제권 침해를 인정했다. 저작자 허락 없이 기출문제를 상업적으로 이용하면 저작권법 위반이 명백하다는 결론이다.

img

그러나 법원의 입장과 달리 시험문제를 둘러싼 저작권 분쟁은 끊이지 않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외국의 자격시험문제를 빼돌리는 일이다. 2002년 해외에서 GRE(미국 대학원 입학시험)를 본 수험생이 후기 형식의 글을 올리는 방식으로 문제를 공개하는 바람에 국내 CBT 시험이 폐지됐다. 2007년에는 SAT(미국 대학입학 자격시험) 문제가 유출돼 시험결과가 무효로 처리됐고, 미국 간호사 자격시험의 기출문제가 인터넷에 나돌아 국내 시험이 중단되기에 이르렀다.

이런 일이 생길 때마다 언론은 나라 망신이라며 대대적으로 보도하면서 경각심을 일깨우지만 약발은 오래가지 않았다. 급기야 2009년과 2010년 이태동안 SAT 시험문제가 유출돼 형사고소를 당하는 지경에 이르렀고, 2010년에는 국내 굴지의 학원그룹이 내부직원을 동원해 영어시험 문제를 불법 유출한 사실까지 드러났다. 글로벌 한국의 부끄러운 자화상이 아닐 수 없다.

사태가 이처럼 악화된 데는 성적만능주의와 같은 사회적 요인과 더불어 저작권에 대한 불감증도 한 몫 했다고 본다. “책 도둑은 도둑이 아니다”라는 속담의 연장선상에서 지식이나 정보는 아무나 가져다 쓸 수 있고, 별도로 돈을 내지 않아도 된다는 낡은 관념이 저작권 도둑을 키우는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외국은 다르다. 저작권 선진국인 미국에서 시험문제를 활용하려면 미국교육평가원(ETS)의 허락을 받아 정해진 이용료를 내야 한다. GRE 문제를 비영리로 쓰면 문항당 225달러, 영리로 쓰면 450달러를 내는 식이다. 시험지시사항은 2배로 올라간다. 호주는 인쇄부수에 따라 8~15%의 요율을 매겨 징수한다. 어느 나라든 공짜는 없다는 이야기다.

이에 비해 우리는 법의 사각지대에 방치돼 있다시피 하다. 출제와 관리를 책임지고 있는 공공기관마저 권리 위에서 잠자고 있는 곳이 많다. 정당한 절차가 있는 데도 민원발생을 우려해 회피하는 것은 전형적인 보신주의다. 실제로 민원의 소지도 없다. 유료화 전략을 도입하더라도 비영리 목적으로 시험문제를 이용할 경우 종전처럼 무료로 하고, 온라인강의나 출판 등 영리활동을 할 때만 계약토록 하면 아무런 불편이 없다.

국사편찬위원회이나 코레일의 앞서가는 예를 보면 쉽게 답을 찾을 수 있다. 국편의 한국사능력검정시험에 나온 문제를 교육업체에서 이용할 때 시험문제의 성격에 따라 5,000~20,000원을 내면 자유롭고 떳떳하게 복제할 수 있다. 대전역에서 줄 서서 구입하는 빵집 성심당이 소보로 포장지에 코레일 로고를 쓰면서 사용료를 내는 식이다. 따라서 시험을 관장하는 공공기관들은 더 이상 눈치를 보거나 미룰 일이 아니라 적극적인 저작권 정책을 수립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불법이용이 판을 치게 되고, 이를 방치하는 것은 수많은 저작권 침해사범을 양산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저작권에 대한 왜곡된 의식을 심어줄 수도 있다.

이제 생각의 전환이 필요하다. 저작권의 합법적 활용을 유도하는 것은 교육시장을 불법의 수렁에서 건져내 국가의 법질서를 구현하는 데 도움이 된다. 신뢰할만한 기관을 창구로 삼아 권리를 제대로 처리토록 하고,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저작권사용료로 응시료를 낮추면 어떨까. 이렇게 하는 것이 전체 국민에게 혜택을 주는 공공서비스 정신에 부합하면서 창조경제에 이바지하는 길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