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차태서
( 성균관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시대적 화두: 미국이란 무엇인가? 미국인이란 누구인가
2016년, 2020년, 2024년 세 차례에 걸친 미국 대선은 각각이 분절된 별개의 사건들이 아니다. 동일한 주제를 놓고 양대 사회세력이 줄곧 격돌하고 있는 미국 현대사의 중대국면을 형성한다는 점에서 하나의 에피소드로 묶일 수 있다. 그리고 이 치열한 정치적 경합에 대해 조 바이든은 에이브러햄 링컨의 표현을 빌어 “우리의 더 나은 천사와 어두운 욕동 사이에” 벌어지고 있는 “미국의 영혼을 둘러싼 전투”라는 이름을 붙여준 바 있다.
이 전선의 한쪽 편에는 미국을 자유주의적 신조에 기초한 나라라고 상상하는 세력이 자리 잡고 있다. 이들은 미국의 본질이 독립선언서에서 선포된 “자명한 진리”와 연방헌법에 명시된 기본권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 핵심 관념 혹은 원칙에 동의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미국인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반면, 전선 반대편의 사람들은 미국이란 결국 백인 기독교도들로 구성된 배타적 공동체라고 호명한다. 이런 맥락에서 J.D. 밴스는 미국이 단지 한 묶음의 이념이나 원칙으로 환원될 수 없는 “조국(homeland)”, 또는 근대유럽적인 의미에서의 “민족(nation)”이라고 정의 내린다.
이와 같은 미국의 국가정체성을 둘러싼 보편주의적 공민 민족주의(civic nationalism) 대 특수주의적 종족-종교 민족주의(ethnoreligious nationalism)의 충돌은 국내정치 차원을 넘어 미국외교정책에 대한 노선갈등으로까지 이어진다. 전자가 예외주의 정신에 입각해 미국의 이미지로 세계를 변환시키려 하는 기성 자유국제주의 독트린과 조응하는 반면, 후자는 과거 미국이 자비로운 패권국가로서 지구공공재를 제공해온 행적이 도리어 국력의 낭비를 초래했다고 비판한다. 즉, 현실주의적 세계관에 입각해 여타 강대국들과 다를 바 없이 상대적 이익의 추구를 대전략의 목표로 내세운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지금까지 우리가 살아온 세계질서가 워싱턴의 자유패권전략에 기반해 건설되어 온 것임을 상기해 볼 때, 국가정체성을 둘러싼 “영혼 투쟁”의 향방은 미국이라는 일국차원을 넘어 전지구적 시스템 자체의 성격을 뒤바꿀 수 있는 파괴력을 지니고 있다. 1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우리가 계속 숨죽이며 미국 내 사회세력간 경쟁을 주시하고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2024 대선의 향후 관전 포인트: 진보적 편향의 문제
2024년 여름에 들어 대선 캠페인 과정은 미국사에 유례를 찾기 힘든 격동의 과정을 거쳤다. 6월 말 TV 토론회에서 충격적으로 노출된 바이든의 노쇠한 모습은 후보사퇴 압박으로 이어졌지만, 일단 그는 버티는 제스처를 취했다. 그러나 뒤이어 발생한 트럼프의 총격암살미수 사건은 예상치 못한 후과들을 낳았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바이든의 사퇴였다. 더 이상 감내하기 어려울 만큼 경쟁의 균형추가 기울기 시작했다는 판단이 작동했던 것이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드러난 또 하나의 주목되는 지점은 아이러니하게도 트럼프의 지지율이 피습후에도 그다지 오르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이는 그만큼이나 미국 사회가 무섭게 양극화되어 있다는 증거였다. 이른바 중도층의 범위가 크게 줄어든 상황에서, 아무리 극적인 사건이 일어나더라도 유권자들이 지지 후보를 바꾸는 경우가 드물어진 것이다.
아무튼 카멀라 해리스가 새롭게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면서, 현재 미국 대선은 이전의 “정상적” 모습으로 원상회복되고 있다. 바이든의 건강이상설 때문에 허물어져 가던 민주당의 지지층 연합이 해리스의 등판으로 빠르게 복원된 것이다. 이에 따라 다시금 양 진영의 세력균형이 부활하면서 지난 두 차례의 대선과 마찬가지로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참호전의 양상이 재연되고 있다. 여기에는 그나마 백인 남성이었던 바이든이 대표주자였기에 조금은 희석되었던 정체성 전쟁의 양상이 유색인 여성 후보의 등장으로 더할 수 없이 첨예해져 버린 변화도 한몫하고 있다.
이 지점에서 우리가 한가지 유의할 점은 미국 대선분석의 주류 담론에서 종종 발견되는 리버럴 편향의 문제이다. 트럼프는 지난 10년 남짓의 정치 커리어에서 중도층 혹은 부동층을 공략하는 전략을 주되게 사용한 적이 없다. 오히려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포퓰리스트적 수사를 통해 지지층을 격동시키는 방식으로 자신의 정치적 길을 개척해 왔다. 트럼프가 대통령 임기 내내 40%대의 지지율을 대략 유지했다는 사실은 그것이 너무 낮아서 문제였던 것이 아니라, 그 정도의 지지층이 한결같게 버텼다는 점에서 더 경이로웠다. 그리고 퇴임 후에도 그런 갈라치기 전략을 일관되게 수행한 트럼프는 MAGA 운동의 지도자로서 공화당 조직을 완전히 접수하고 당 자체의 성격을 운동가적 정당의 형태로 전환시키는 데까지 성공했다.
어차피 나라가 둘로 쪼개져 버린 정치적 양극화 시대에 “내 편”이 아닌 사람들을 끌어올 이유는 없다는 것이 진영주의적 계산법이고, 그런 면에서 트럼프는 정치적 “부족”의 수장으로서 나름 최적의 전략을 수행해 왔다. 이런 맥락에서 공화당이 탈냉전기 대통령 선거에서—대테러전 국면에서 예외적인 전시 결집 효과(rally-round-the-flag effect)가 발생했던—2004년 사례를 제외하고는 총 득표수(popular vote)에서 민주당을 이긴 적이 단 한 번도 없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다시 말해, 갈수록 도시화, 다인종화, 탈기독교화가 진행되고 있는 현대 미국사회의 인구학적 변동상 농촌, 백인, 기독교 정당으로 화석화된 공화당이 수백만 표정도 총득표수 대결에서 민주당에 지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결과가 되어 버렸다.
그러나 다행히도(?) 지난 30여 년간 공화당의 대선 필승전략은—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렛의 표현을 빌면—“소수의 전제(tyranny of the minority)”를 허용하는 연방헌법의 결함, 특히 선거인단제를 활용하는 데 있다. 즉, 경합주들(swing states)에 사는 기껏해야 수십만 명 정도의 저학력 백인 중하층의 격동과 분노—“인도인인지 흑인인지도 모를 이상하게 웃고 급진좌파 여성인 해리스의 당선은 절대 용납할 수 없다”—만 제대로 동원할 수 있으면, 총득표수와 상관없이 대선에서 승리할 수 있는 것이다.
추가하여, 해리스 선거운동이 트럼프 진영을 “이상하다(weird)”고 라벨링하는 것 또한 자신의 진영을 동원하는 전략으로 그 의미가 국한된다고 여겨진다. 사실 이러한 레토릭은 그 효과에 있어 과거 2016 대선 당시 힐러리 클린턴이 트럼프 지지자들을 향해 한 무리의 “개탄스러운 자들(deplorables)”이라고 칭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너 이상해”라는 비판에 대한 상대방의 반응은 응당 “너가 더 이상해”가 될 수밖에 없고, 규범이론적으로 말하자면, 결국은 상대진영과 대화할 마음은 전혀 없다는 선언과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이 역시 사회통합에 기여하는 접근과는 거리가 먼 부족주의 시대의 캠페인 전술일 따름이다.
결론적으로 이상의 점들을 종합적으로 고려할 때, “정치적으로 올바른” 방식으로만 2024 대선, 나아가 포퓰리즘 시대의 미국사회를 읽는 위험을 어느 정도 교정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