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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고대사회를 이끌었던 신라국이 천년의 역사를 마감하고 고려국에 나라를 넘기면서 한국중세사의 문을 연 곳이 바로 강원도이다. 강원도는 단군조선과 위만조선의 중심지가 아니었으며 고구려의 중심지도 아니었고 백제의 중심지는 더욱 아니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면서 강원도는 한국고대사의 일원으로 나름의 역할은 하지만 역시 신라의 중심지는 아니었다. 그런 강원도가 한국고대사회의 문을 닫고 한국중세사의 문을 여는 중심지가 되었던 것이다. 그 역사의 현장으로 찾아 가 보자.
한국고대사의 정점에 있는 신라사회는 세계에 빛나는 황금의 나라로 만들었다.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주는 많은 금관을 비롯하여 금귀걸이 등 찬란한 금 세공품, 불국사와 석굴암을 비롯한 황룡사와 분황사, 그 사찰들이 품었던 수많은 불상과 석탑 그리고 불화(佛畫) 등 신라 영토 곳곳에 찬란한 불교문화를 꽃피웠다. 그러나 신라는 김씨만이 성골과 진골이라 하여 관직과 토지를 독점하여 일반 백성에게는 이를 향유할 수 있는 여유를 허락하지 않았다. 강원도는 일반 백성에게는 관직과 토지의 소유를 허락하지 않았던 신라를 붕괴시키고 보다 나은 사회, 즉 한국중세사를 시작하는 고려를 건국하는 온상이 되었다. 고려는 신라와 달리 과거라는 시험을 통과하면 일반 백성도 관직에 오를 수 있고 그러면 토지를 소유할 수 있으며 재산을 축적할 수 있는 사회를 건설하였다. 그래서 왕족이 아닌 보통 사람도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권리를 향유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한 시대를 마감하고 새로운 시대를 연다는 것은 보다 나은 진보된 사회를 구현하는 것이다. 그 중심에 강원도가 있었다. 한국중세사는 신라의 쇠퇴를 기반으로 문경 출신의 견훤이 892년, 전라도 전주에서 후백제를 건국하였다. 경주 출신의 궁예는 경주를 떠나 영월 태화산 세달사(世達寺)에서 스님이 되고서 왕이 되고자 서원을 세웠다. 그런 궁예가 892년, 원주 양길의 군사를 원주 치악산 석남사(石南寺)에서 모아 주천 → 영월 → 울오 → 어진 등을 습격하여 모두 항복을 받았다. 그런 후에 894년에 명주로 들어가 군사 3,500명을 모아 장군이라 칭하였다. 이러한 병력을 14개의 부대로 나누어 인제 → 화천 → 김화 → 금성 → 철원 등의 여러 성을 격파하고 황해도 지역까지 장악하고서 901년 나라를 건국하였다. 이때 궁예가 세운 나라가 고려이다. 우리는 왕건이 고려를 건국한 것으로 배우고 있으나 고려는 분명 강원도에서 왕이 된 궁예가 세운 나라이다. 그리고 견훤이 세운 나라 이름은 백제를 계승한다는 후백제(後百濟)이지만 궁예는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고구려의 같은 이름인 고려라 칭하였다. 후고구려(後高句麗)가 아니라 ‘고려(高麗)’인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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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예가 강원도에서 세력을 확장하는 과정에 흥미로운 일이 있다. 궁예는 주천에서 어진까지, 인제에서 철원까지 습격〔침습:侵襲〕하고 격파(擊破)하는 방식으로 이 지역들을 장악하였으나 강릉은 유독히 습격이나 격파라는 용어를 쓰지 않고 진입(進入), 즉 아무런 문제없이 들어갔다고 하였다. 이는 궁예가 강릉에서 전투를 치르지 않았음을 알 수 있는데 이는 강릉의 지배권을 가진 김주원 후예들의 지지가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김주원은 785년, 선덕왕을 이어 원성왕이 되는 김경신과 왕권 계승에서 밀려 강릉으로 터를 옮긴 강릉김씨 시조이다. 궁예와 김주원은 모두 경주에서 권력 다툼의 희생양이라는 동질감이 작용했을 가능성이 있는 부분이다. 이러한 배경으로 두 세력은 의기투합하여 강릉인과 함께 3,500명의 군대를 편성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고 보여진다. 강릉의 김주원 세력은 또다른 특징이 있다. 한국불교는 400년을 전후한 시기에 불교가 전래되고 820년대까지는 경전 공부를 중심으로 수행하는 교종불교(敎宗佛敎)였다. 그런데 821년, 당나라에서 귀국하여 양양 진전사에서 처음으로 산문(山門)을 열은 진전도의선사가 전래한 선종불교(禪宗佛敎)가 시작되고 850년대 이후에는 신라사회 전반에 선종불교가 풍미하게 되었다. 이때 강릉은 범일국사가 굴산산문을 열어 선종불교를 동해안 지역에 확산시켰다. 범일은 831년(흥덕왕 6)에 왕자 김의종과 함께 당나라에 유학하고 847년에 귀국하여 851년까지 백달산에서 정진하다 명주도독의 요청으로 굴산사(崛山寺)로 옮겨 40여 년 동안 후학들을 가르쳤다. 경문왕·헌강왕·정강왕이 국사(國師)로 받들고자 하였으나 모두 사양하고 889에 입적한 선종 승려이다. 강릉의 굴산사는 구정면에 있는 대규모 사찰이었는데 이처럼 큰 사찰은 지역 호족의 후원이 없으면 경영되기 어려운 규모였다. 이는 강릉김씨의 후원이 전제되어야 가능한 일이고 범일의 제자 낭원개청이 인근 보현사에 머물 때에도 강릉김씨인 김순식의 적극적 후원을 받는 것을 보아도 궁예의 강릉 입성은 이들의 지지가 있었기 때문에 별다른 전투없이 가능했던 것으로 이해가 된다. 이는 궁예가 한국중세사의 시작을 알리는 고려국 건설의 전주곡이었던 셈이다. 궁예가 한국고대사의 중심국가 신라를 멸망시키기 위한 준비작업의 과정이었던 영월 세달사와 원주 석남사를 가보자. 영월 세달사는 태화산 남쪽에 있다. 주변에는 태화산성과 정양산성 그리고 대야리산성이 있으며 조금 아래쪽에 온달산성이 있어서 신라와 고구려의 전투가 빈번했던 지역임을 알 수 있다. 세달사는 고려시대에 흥교사(興敎寺)로 이름이 바뀌는데 발굴조사에서 여러 건물지가 확인되었으며 궁예가 스님이 되던 시기보다 조금 이른 850년대 석탑의 기단부 상대면석이 발견되었고 ‘세달(世達)’과 ‘흥교(興敎)’라 새긴 기와를 비롯하여 여러 유물들이 출토되어 큰 사찰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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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 석남사는 치악산 남쪽에 있다. 석남사도 발굴조사에서 여러 건물지와 ‘석남사(石南寺)’라 새긴 기와가 출토되었다. 석남사는 치악산의 깊숙한 산속에 있는 사찰인데 왜! 궁예는 이곳에서 군사를 모아 출발지로 잡았는지는 그가 강릉을 향하는 방향성을 보면 이해가 된다. 석남사는 신림면에서 주천 → 영월로 가는 길목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정리하면 간단하다. 궁예는 영월 세달사에서 큰 나라를 세워 임금이 되고자 원대한 꿈을 꾸고 원주 치악산 석남사에서 군사를 모아 출발하여 주천과 영월을 지나 강릉에 도착하여 굴산사를 후원하던 강릉김씨 세력의 지원을 받아 인제, 화천, 김화, 금성, 철원에 도착하여 고려를 건국함으로써 한국중세사를 시작하는 것이다. 새로운 사회, 이는 성골과 진골이 아니어도 관료가 될 수 있고 능력만 있다면 최고의 관직에도 오를 수 있는 새로운 사회를 지향했고 그들은 이런 사회를 만들었다. 이러한 새로운 사회를 강원도에서 시작하였는데 세달사와 석남사가 그 요람이 되었고 굴산사의 이대올로기를 후원하던 강릉김씨는 그 힘의 원천을 제공했으며 철원은 새로운 사회를 만든 국가체의 중심이 되었던 것이다. 역사의 변방으로 인식돼 온 강원도는 한국중세사를 시작한 중요한 역사의 현장이었고 역사의 전환점에서 영월 세달사, 원주 석남사, 강릉 굴산사는 에너지를 잉태하는 거점이었음을 우리는 새롭게 기억하면 좋을 것이다. 이러한 중요성을 인정하여 세달사 터와 석남사 터는 2022년과 2021년에 각기 강원특별자치도 기념물로 지정되었고 굴산사 터는 2003년에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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