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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는 낭만으로 포장할 수 있지만 그 위에 서면 무섭다. 깊이를 알 수 없는 검푸른 세계가 주는 공포심은 가름할 수조차 없다. 인간은 심연의 공포를 이겨내는 방법을 아주 가까운 곳에서 찾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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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척 정라진 육향산 초입에 선대의 선정을 기리는 불망비 7개가 나란히 서 있다. 위 글은 필자가 강원도민일보에 연재했던 ‘민속디자인 읽기’라는 컬럼 중에 육향산 불망비 이수의 문양에 대해 내놓은 해석이다. 불망비의 지붕 격인 이수에 새겨진 문양이 관심을 끌기 시작한 것은 국립중앙박물관 최순우 전 관장과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이 '이름 없는 석공의 추상미, 기이한 문양'이라는 해석을 내놓으면서부터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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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월대보름과 10월 말일(午日) 남근을 깎아 바치며 서낭제를 지내는 삼척 신남의 해신당은 그 독특함으로 유명세를 탔다. 이 전통을 바탕으로 1999년 남근깎기대회가 열렸고, 외신에도 대서특필되는 등 세계적인 관심을 끌었다. 여성단체의 반대를 무릅쓰고, 대회에서 모은 작품을 해신당 인근에 펼쳐놓고 ‘해신당공원’이라고 만천하에 공개했다. 해신당의 여신은 바다에 미역 따러 나갔다가 풍랑에 희생된 넋이다. 안타깝게 목숨을 잃은 이후 마을에 흉사가 계속되었다. 어느 날 술 취한 주민이 바다를 향해 노상방뇨 했는데 이튿날, 조업에서는 만선, 오랜만에 뱃전에 성주기를 꼽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 후로 남근을 깎아 바치며 마을이 풍요를 이루었다는 것이 해신당에 전하는 전설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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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의 해령사는 삼척의 해신당처럼 육지에서 바다 쪽으로 삐죽 나온, 곶에 위치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역시 남근을 깎아 바쳤다. 다만 삼척은 진행 중인데 비해 강릉은 여서낭이 시집가면서 전승이 마무리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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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릿가에 전승되는 남근봉납 중에 가장 다이나믹한 곳은 고성군 문암리 망개마을이다. 문암리의 암서낭, 부신당은 당집 없는 갯바위가 서낭이다. 거친 파도와 바람이 낸 상처로 구멍이 숭숭 뚫려 있거나 깊이 파여있다.
전하는 이야기는 동해안의 여느 암서낭과 비슷한 맥락에 있다. 마을의 한 어부는 조업에 나섰으나 늘 허탕을 쳤다. 화를 풀자고 부신당에서 육담을 섞어 욕을 퍼부었는데 이튿날 대박이 났다. 어부는 몰래 남근을 깎아 부신당에 두었더니 조업은 물론 집안까지 잘되었다. 소문은 곧 마을로 이어져 남근을 깎아 바치는 풍속이 생겼다는 것이 주민들의 주장이다. ‘망개’마을에서는 5년마다 풍어제를 지내는데 구멍 뚫린 바위에 남근을 넣는다. 오리나무로 3개를 깎아 여서낭 바위 구멍에 꽂아 넣고 ‘한번에 맞으면 풍어’가 온다고 믿는다. 마을 주민들은 ‘우리 서낭님은 엄하고 귀한 분’이라며 귀하게 모시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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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신앙은 한반도뿐 아니라 전 세계에서 전승하는 민간신앙으로 그 생명력은 유효하다. 인도를 비롯한 힌두교 권에서 남근을 형상화한 링가를 끔찍이 모시는데 이는 링가가 파괴와 창조의 신 시바의 변신이기 때문이다. 일본은 남근을 모시고 시가지를 행진하는 축제를 벌여 세계인의 주목을 받고 있다. 남녀 성기를 닮은 자연 조형물에는 아들, 혹은 자식을 얻기 위한 기자 신앙이 현존하고 있다. 남녀의 성기와 닮은 자연물이나 인공물을 제작하여 받들고 비손하고 자식 낳기를 바라는 것이 인류의 보편적인 문화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동해안에서 남근은 바다의 여신을 달래기 위한 제물이다. 남근을 숭배하는 것이 아니라 제물로 바쳐 복을 구하는 독특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특히 망개마을의 그 강력함은 유례를 찾아보기 어렵다. 이러한 행위를 지속적으로 이어가는 힘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그 이유는 밖으로 드러난 설화보다는 몸속 깊은 곳에 오래도록 체득된 그들만의 유전자DNA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일부 민속학자들은 남근봉납 풍속의 기원을 고구려의 제천의례 ‘동맹’에서 찾는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 고구려 전을 보면 “10월에 하늘에 제사 지내는 큰 모임이 있으니 그 이름을 ‘東盟’이라 한다. 그 나라의 동쪽에 큰 굴이 있는데 그것을 수신(隧神)이라 부르며, 또한 10월에 그 神을 맞이하여 제사 지낸다”고 기록되어 있다. 김종대 국립민속박물관장은 동맹에서는 수신에게 제사를 지내면서 나무로 만든 수신을 신의 좌석에 모시는데 ‘나무 수신이 바로 남근’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망개마을의 여서낭 자리를 부신당이라고 하는데 서울 경기 지역의 부군당과 연관있어 보인다고 추정했다. 부군당은 원래 부근당(附根堂)으로 불리던 곳으로 근(根)과 신(腎)은 남자의 성을 상징하는 동의어이다. 이능화의 ‘조선무속고’에 서울 부근당에 시집가지 못하고 죽은 손각씨를 모셨는데 목경물을 매달아 놓았다는 기록도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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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으로 동해안은 고조선에서 동예 그리고 고구려, 신라로 주인이 바뀌어 왔고, 안압지나 황룡사지 등 신라유적지에서도 남근 숭배 흔적이 발견되고 있다. 고구려, 신라의 풍속이 이어진 결과라고 보기엔 너무 긴 세월이 지났지만 일말의 연관성을 고려한다면 남근 봉납의 역사는 2천년이 넘는 의례라고 보아야 한다. 강릉단오제도 고조선과 예의 제천행사인 ‘무천’에서 비롯되었다는 연구가 있다. 동해안의 남근 봉납 풍속을 나릿가의 특이한 풍속으로 볼거리나 흥밋거리로 치부하기보다는 넓은 폭과 깊이를 가지고 인간의 심연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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