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사찰, 특히 고찰(古刹)에는 어김없이 사찰의 마당 한가운데에 사리탑이 높직한 모습으로 서 있다. 황룡사에는 1기가 목탑으로 있었고 감은사와 불국사는 석탑 2기가 있었으며 가장 이른 시기의 익산의 미륵사에는 목탑 1기와 석탑 2기가 건립되었다. 그런데 이 탑들은 어김없이 부처님의 사리를 봉안하였다. 그러면 부처님의 사리가 얼마나 많았으면 인도와 중국 그리고 동남아시아의 여러 나라, 또한 한국의 모든 석탑에 사리를 봉안할 수 있었을까?
 고타마 싯달타가 6년간의 수행을 거치면서 부다가야에서 깨달음을 얻은 후 인도 전역을 순력하며 불교의 진리를 세상에 알리고 쿠시나가라에서 열반에 들자 인도의 장례풍습이었던 화장(火葬;다비식) 의식을 거치게 되었다. 장례를 마치자 8섬 4말의 사리가 출현하였다고 한다. 8섬 4말이란 인도에서 전통적으로 ‘많다’라는 의미로 쓰이는 용어이기도 하다. 그래도 인도와 중국 그리고 동남아시아에 건립된 엄청난 사리탑에 모두 사리를 봉안한다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이에 사리를 구할 수 없을 경우에 사리탑을 건립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불설조탑공덕경」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이는 탑을 건립할 때에 사리를 구하지 못할 경우, 대장경의 일부라도 봉안하면 사리를 봉안한 것과 같은 공덕을 쌓을 수 있다는 것이 경전의 해설이다. 하지만 신라에서는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봉안하기 위하여 무던히 노력하였다. 그 노력은 『삼국유사』의 「전후소장 사리(前後所將 舍利)」조에 보인다.
 자장율사가 모셔온 사리는 통도사의 금강계단(金剛戒壇)에 지금도 봉안되어 있어서 통도사를 「불보종찰(佛寶宗刹)」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렇게 선덕여왕 재임시기에 봉안된 사리는 시대가 흘러 가면서 변화를 갖게 되었다. 즉, 황룡사 목조9층탑은 643년에 사리를 봉안하고 645년에 백제의 아비지에 의해 완공을 보았지만 1238년, 몽골군이 침입하였을 때에 불에 타서 역사 속에서 잊혀지게 되었다.1) 태화사도 조선초기에 폐사되어 잊혀지게 되고 통도사만이 오늘날까지 세상에 알려져 부처님의 유일한 진신사리를 모신 사찰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전국이 전쟁의 소용돌이에 빠져들 때 통도사도 난리를 겪게 되었다. 여러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진신사리는 지켜지지만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통도사가 다시 전쟁의 피해를 입게 될 것을 염려한 의병장 사명대사는 통도사에 봉안된 진신사리를 금강산으로 옮겨 스승인 서산대사께 보여드리게 되었다. 이때 서산대사가 사리 일부를 묘향산 보현사로 옮기고 이 과정을 「사바세계 석가세존의 금골사리부도비」에 직접 적어 놓았다.
 위의 자료를 보면 보현사에 봉안한 금골사리는 휴정의 제자인 유정이 임진왜란 당시에 통도사 금강계단이 왜군에 의해 훼손되고 사리가 절취될 상황이 주어지자 사명대사는 사리를 갖고 휴정을 찾아가 금강산에 봉안할 것을 제안하였다. 휴정은 금강산 역시 바다와 가까이에 있으므로 안전하지 않고 왜군은 사리에 관심이 없으니 한 함은 통도사로 다시 보내 안치하고, 하나의 함은 휴정의 주석처인 보현사로 옮겨 1603년 금골사리부도를 건립하고 봉안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때가 정유년에 일본군이 다시 침략하는 시기임을 알 수 있는데 위의 인용문에서 ‘수군들이 부도를 파헤친 것은’이라 하였는데 이는 난리에 피해를 본 것은 임진왜란이고 사리를 금강산으로 옮긴 것은 정유재란으로 다시 피해를 볼까 염려되어 옮긴 것이니 1597년을 전후한 시기가 된다. 이는 대구 용연사의 「석가여래비(釋迦如來碑)」에도 기록되었다.
 이를 보아도 정유재란으로 통도사가 다시 전쟁의 피해를 입게 될 것을 우려한 사명대사가 통도사의 진신사리를 강원도 금강산 건봉사로 옮기자 서산대사는 한 함을 평안도 묘향산 보현사로 옮겨 봉안하고 이외의 사리는 통도사에 봉안하라고 명하였으나 정유재란으로 통도사 주변 지역에서 다시 전쟁에 일어나자 횡성 치악산 각림사에 사리를 임시 보관하게 되었다. 이런 과정에서 서산대사가 보현사에 진신사리탑을 건립한 다음 해인 1604년 1월 23일, 묘향산 원적암에서 입적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사명당은 스승의 장례에 참석하기 위해 묘향산으로 향하던 중에 선조는 사명당에게 탐적사(探賊使)라는 신분으로 일본에 다녀오라는 명을 내리게 되었다. 이로 인해 사명당은 스승의 장례식에 참여하지 못하고 일본으로 출발하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통도사의 진신사리는 영변 보현사와 대구 용연사 그리고 원래 있던 양산 통도사에 분사리(分舍利)되었다.
 그러면 건봉사의 부처님 진신사리는 어떻게 봉안하게 되었을까. 이에는 또다른 이야기에 전해지는데 이는 건봉사 「석가치상탑비」와 「사명대사기적비」에 아래와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이를 보면 사명대사가 일본에서 조선인 포로 1천5백명 또는 3천명을 데리고 돌아 올 때 치아사리 12매를 가져와 건봉사에 봉안했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합천 해인사와 밀양 홍제사에 세운 사명당비에는 일본에서 사리를 옮겨왔다는 기록이 없다. 그리고 사명당은 1604년에 귀국하고 1605년에 선조에게 일본에서 돌아 왔음을 보고하고 묘향산으로 가서 장례에 참석하지 못한 스승의 영정과 사리탑에 예배하였으며 1606년에 한양 궁궐 재건에 힘쓰고 1607년에는 치악산에 들어갔다. 이는 횡성 치악산 각림사에 머물렀던 것으로 보인다. 각림사는 사명당이 정유재란 당시에 통도사 사리를 임시로 보관했던 사찰로 이 사리를 확인하거나 또는 용연사와 통도사에 봉안하기 위한 계획을 하려는 행보로 추정된다. 이듬해인 1608년에 선조가 승하하자 사명당은 한양에 가서 조문하며 통곡하다가 병을 얻어 1610년에 해인사 홍제암에서 입적하였다. 이 과정을 보면 사명당은 치아사리를 봉안하기 위해 건봉사를 다녀가지 않았고 치아사리를 봉안할 만한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따라서 건봉사의 진신사리는 정유재란으로 통도사가 전쟁에 휘말릴 것을 염려하여 통도사 진신사리를 금강산으로 옮길 때에 일부의 사리를 건봉사에 봉안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통도사의 부처님 진신사리는 강원 고성의 건봉사에서 금강산 건봉사, 묘향산 보현사, 비슬산 용연사, 영축산 통도사에 각기 봉안되었음을 알 수 있으니 통도사의 부처님 진신사리는 강원 금강산 건봉사에서 전국으로 분장(分藏)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통도사의 사리가 여러 사찰에 나누어 분장된 사리탑의 양식이 기존 사리탑의 양식에서 파격적인 모습으로 변화되었다. 통도사의 사리탑은 2중으로 난간석을 돌린 후, 그 안에 2단으로 된 넓은 사각형의 대(臺)를 만들고 중앙에 범종 형태를 닮은 사리탑을 세웠다. 대구 용연사 사리탑은 이를 모방하여 만들었고 건봉사는 유점사 백화암에 건립된 조선 중기 고승의 부도를 모방하여 만들었다. 보현사는 사리탑의 모양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려진 바가 없으나 서산대사가 사리탑을 조성할 때에 “한 함을 다시 유정에게 주니 유정(사명당)은 … 함을 받아서 옛터에 돌아가 종에 봉안하였다. … 휴정(서산대사)의 혼자 힘으로는 어찌 할 수가 없어 문인 지정과 법란 등에게 그 일을 주선하여 종(鍾)에 봉안하게 하였다.”고 하였고 사명당이 입적하자 화장을 하고 나온 사리 1과를 부도를 조성하여 봉안하는데 “정수리 사리 1과를 얻어 석종(石鍾)을 다듬어 안장하고 … ”라 하였다. 이는 모양이 모두 ‘종’이라는 동일한 단어가 등장하는데 해인사에 건립된 사명당의 부도가 석종형이고 통도사의 사리탑도 중앙에 석종형으로 조성되었다. 그런데 보현사에 사리탑으로 전해지는 금골사리부도는 석탑형으로 전하고 있는데2) 추정컨대 기록으로 보면 석종형일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보현사에 전하는 석탑형의 사리탑 가장 위쪽에 석종형 사리탑이 올려져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이렇게 사리탑의 원형으로 추정해 보는 것도 생각해 볼 일이다.
  거듭 정리하면, 자장율사에 의해 전래된 부처님의 진신사리는 정유재란으로 통도사에서 강원도 건봉사로 옮겨지고 이 진신사리는 금강산 건봉사, 묘향산 보현사, 대구 용연사 그리고 양산 통도사에 나뉘어 봉안되게 되었으니 분장되는 중심은 금강산 건봉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