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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번 국도를 따라 속초에서 고성을 향해 오르다 보면 바닷가를 배경으로 멋지게 서있는 정자를 홀연 만난다. 청간정(淸澗亭)이다. 누정을 오르면 드넓게 펼쳐진 백사장 너머로 푸른 바다가 한없이 펼쳐진다. 답답했던 마음이 활연(豁然)히 트이면서 하늘과 바다가 맞닿은 곳으로 흐르는 은하를 타고 하늘로 오르는 듯하다. 청간정은 강원특별자치도 고성군(高城郡) 토성면(土城面) 바닷가에 위치한 정자다. 말 그대로 맑은 시내가 동해로 흘러 들어가는 꼭짓점에 자리하고 있다. 이곳은 두 명의 대통령이 글씨와 시를 남긴 곳이므로, 누정에 올라서 우리 현대사의 굴곡을 생각해보는 계기를 마련해 주기도 한다. 이승만 전 대통령은 1953년 5월 15일 ‘청간정’이라는 현판 글씨를 남겼고, 최규하 전 대통령은 1980년 여름 이곳에 들러서 연구(聯句)를 짓고 직접 글씨를 써서 시판으로 남겼다. 원래 이 정자의 명칭은 청간역(淸澗驛)이라고 하는 역말과 관련이 있다. 간성군 관아의 부속 건물로 이용되었기 때문이다. 근대 이전의 청간정은 현재의 위치와는 다른 곳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와 관련된 기록도 명확하게 남아있지 않아서 다양한 기록의 조각들을 통해서 전반적인 윤곽을 그려볼 뿐이다. 특히 청간정은 늘 만경대(萬景臺) 혹은 만경루(萬景樓)와 병칭되어 왔다. 실제로 조선 후기의 시문 및 서화에서도 두 건물은 나란히 배치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정철(鄭澈, 1536~1593)의 가사 작품 「관동별곡(關東別曲)」에서도 ‘청간정 ‘청간정 만경 몇 고 안돗던고’ 라고 하여 두 명칭이 나란히 표기되어 있다. 역사적으로 보면 청간정보다 만경대가 먼저 기록에 등장한다. 만경대는 고려 후기가 되면 이미 문헌에 등장한다. 그것은 만경루라고 하는 전각의 존재 여부 이전에 바닷가에 우뚝 솟아있는 자연경관으로서의 ‘만경대’가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동팔경의 구체적인 장소가 거론되던 16세기 후반에는 청간정이 대표 명칭으로 자리를 잡았다.청간정의 건립 연대는 몇 가지 이설이 있기는 하지만, 이 누정이 조선 지식인 사회에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1519년경 최천 에 의해 중수된 이후부터이다. 어떤 곳이든 하나의 장소가 명소로 인식되기 위해서는 중요한 계기가 필요하다. 관동팔경의 다른 장소에 비하면 청간정은 명승으로서의 문화적 강렬도가 약했다. 심지어 남한조(南漢朝, 1744~1809)는 관동팔경 중에서 망양정과 청간정은 바다에 임하여 가로막는 것이 없어서 탁 트인 점은 있지만 기록할 만한 기이한 풍치(風致)는 없기 때문에 고성의 해산정(海山亭)과 해금강으로 대치하기까지 했다. 실제로 청간정이 관동팔경 중에 분명히 자리를 잡게 된 이후 조선 후기 문인들의 글에는 청간정에 대한 실망감을 표시하는 사람들이 제법 있었던 것 같다. 김종정(金鍾正, 1722~1787)은 청간정이 관동팔경 중의 한 곳이지만 기이한 경관이 없어서 당시 사람들이 그곳을 들르지 않고 그냥 가는 경우가 많았다는 점을 지적하기도 했고, 유인석(柳麟錫, 1842~1915) 역시 청간정이 팔경 중에서 기이한 경관이 적다고 썼다.그렇지만 바다를 직접 눈앞에서 마주할 수 있는 곳은 전국적으로도 흔치 않았으며, 이곳에서의 경험은 많은 문인학사들의 상상력을 자극했다. 생각보다 많은 작품이 이곳을 배경으로 지어졌고, 고성이나 간성으로 고을살이를 하러 가는 사람들을 전송할 때면 청간정은 늘 이 지역을 대표하는 상징 공간으로 꼽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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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간정은 어떻게 이 지역의 상징 공간으로 만들어진 것일까? 최천 의 청간정 증수(增修)를 통해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청간정을 공간적으로 탄생시켰다면, 이 공간을 문학적 상징 공간으로 탄생시킨 사건은 누구의 공일까. 이를 알아보기 위해 우선 몇 가지 기록을 살펴보기로 한다.정자에 남긴 시판을 통해서 우리는 누구의 작품이 문인학사들의 인기를 끌었는지 확인할 수 있다. 바로 차운시(次韻詩)의 존재다. 차천로(車天輅, 1556~1615), 윤휴 1617~1680), 이유원(李裕元, 1814~1888)의 기록에 의하면 청간정의 시판 중에 가장 많은 차운시를 창작하게 한 작품은 16세기 후반~17세기 초반에 활동했던 관료 문인 최립 1539~1612)의 작품이라고 했다. 그 작품은 바로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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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립은 자신의 마음을 바다와 비교하고 천지와 비교하면서, 천지자연의 광활함으로도 비교할 수 없는 마음의 광대무변함을 드러낸다. 청간정에 오르면 눈앞으로 펼쳐지는 바다를 보면서, 그는 무한한 자연 앞에서 인간 마음의 위대함을 새삼 느낀다. 마음의 무한함에 비하면 인간의 신체적 한계는 너무도 명확한 법이어서, 청간정 창문을 닫는 행위를 통해서 그는 외물의 장애에 대한 인식 역시 분명하게 드러낸다. 이러한 시풍은 최립이 간성군수로 재직하던 시기에 주로 보이는 자연의 탈속미와 그에 따른 정심(精深)한 시풍과 일정한 연계를 가지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작품의 제목은 「청간정판운(淸澗亭板韻)」이다. 그가 청간정에서 이 작품을 온전히 자신의 운자로 쓴 것이 아니라 그가 이곳을 방문하기 이전에 누군가가 써서 정자에 걸어두었던 시판의 운자를 빌려서 쓴, 일종의 차운시라는 것이다. 최립은 누구의 시에 차운한 것일까. 바로 조선 중기의 뛰어난 문인 석천(石川) 임억령(林億齡, 1496~1568)의 시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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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위 끝의 갈매기와 바다 위의 고깃배가 동해의 동적 풍경을 구성하는 것이라면 한밤중 머리맡에 들리는 거센 파도 소리와 봄날 밤 창틈으로 들어오는 비바람과 꿈의 경계는 작자의 심리적 풍경을 구성한다. 이런 이미지는 나중에 최립의 시로 이어지면서 속세와 떨어져 존재하는 아름다운 신선세계의 단초를 만든다. 실제로 임억령의 시보다는 최립의 시가 후대 문인들에게 큰 영향을 끼치는데, 이것은 임억령보다는 최립의 시에 차운했다는 기록이 많은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시작은 임억령이 했으되 청간정의 문화적 상징은 최립에게서 만들어졌다는 의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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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립을 필두로 양사언, 이식 등 당대를 대표하는 문인들의 문학적 흔적이 남아있는 청간정은 관동팔경을 유람하는 조선 후기 지식인들에게 지적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그들은 선현들의 작품에 차운을 하면서 그들의 문학적 향기를 잇고자 했다. 양사언과 이식의 작품은 대체로 도선적인 이미지를 드러내면서 청간정을 상상의 공간으로 만들었던 것에 비해, 가장 많은 차운시를 발생시켰던 최립의 작품은 자연경관이 주는 특성을 강조하는 면모를 보였다. 그것은 청간정이 바다에 연접해서 건축되었다는 점, 유학자들이 일상에서 쉽게 접하지 못하는 바다의 무한한 이미지, 바다에서의 일출과 월출이 주는 환상적 풍경 등은 관동팔경 안에서 청간정의 모습을 특성화하는 중요한 요소였다. 이러한 점이 문학적으로 형상화하면서 청간정을 하나의 문화적 공간으로 변화시켰으며, 조선 시대 지식인들에게 명승으로서의 이미지를 각인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정자에 올라 바라보는 창해滄海가 던져주는 기상, 그것에서 확장된 도선적 상상력, 이러한 점을 반영시킨 문학 작품 등이 독자들에게 청간정의 특징적인 장소성을 형성하게 만든다. 바로 이런 점에서 청간정을 소재로 창작된 문학 작품이야말로 자연공간으로서의 청간정을 문화적 혹은 인문적 장소로 변화시키는 요인이라고 할 수 있으며, 명승화의 과정에 기여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할 수 있다. 지금은 군부대 때문에 출입이 금지되어 있지만, 부대 안에 있는 만경대와 더불어 청간정의 온전한 경치를 감상할 수 있는 평화의 시대를 간절히 기원해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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