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문진읍은 영동지역에서 가장 큰 어항과 싱싱한 해산물을 파는 어판장이 있어 유명하다. 1927년 일제강점기에 개항한 주문진항은 순수한 어항이다. 원래 동해안은 해안이 밋밋하여 자연항이 없다. 큰 배들이 정박할 수 없어 영동지역의 어촌은 작은 어선들의 연안 조업으로 생계를 이었다. 이 때문에 반농반어로 살던 대부분 어민은 송곳 하나 박을 땅이라도 제 땅을 가져보는 것이 소원이었다. 위험할 뿐 아니라 수입이 불안전한 어업보다 안전한 땅에서 농사짓는 농촌이 부러웠던 것이다.
 아마도 순수어업으로 생계가 가능해진 어촌이 강원도에서는 주문진이 처음이었을 것이다. 주문진항이 생기면서 큰 어선들의 조업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현재 약 350여 척의 어선이 오징어를 비롯한 각종 어종을 잡고 있다. 덕분에 강릉에서 가장 큰 규모의 수산물시장이 있어 일 년 내내 관광객이 끊이지 않는 곳이기도 하다.
 오로지 바다에 모든 것을 걸고 살아온 주문진의 어민들이 가장 의지한 신은 바로 서낭이다. 일상의 희로애락은 물론이고 특히 바다에서의 안전과 풍요를 보호해주는 여서낭은 주민들에게 각별한 존재이다. 주문진에는 자연마을 단위로 서낭당이 있지만 가장 많은 사람들이 신앙하는 곳은 바로 1리의 큰서낭당이다.
 주문진 큰 서낭당은 푸르른 동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위에 널찍하게 자리잡고 있다. 여러 번 옮겨 다니다가 1954년 신축한 건물인데 영동지역에서 제일 규모가 크다. 서낭당 안에는 세분의 신상과 동자상이 모셔져 있다. 중앙에는 강릉부사를 지낸 우복정경세, 오른쪽에 진이서낭, 왼쪽에는 해수여신의 화상이 있다. 진이서낭 옆에는 동자상이 있는데 진이가 낳은 아들이라고 한다. 서낭당에서 20여 미터쯤 층계를 내려오면 왼쪽으로 작은 터가 있는데 여기에는 서낭지신위를 모신 비석을 모셔 놓았다. 흔히 작은 서낭당 또는 진이서낭당이라고 부른다. 어쩌면 큰서낭당의 신보다 더 먼저 모셨던 신위의 흔적일 수 있겠다.
 주문진 큰서낭당에서 모시는 신격은 일반적인 영동지역 서낭당과 차이점이 있다. 대개는 중앙에 성황지신, 좌우에 토지지신과 여역지신을 모신다. 성황은 마을 전체를 돌보고 토지신은 농업과 생업을 주관하며 여역지신은 외부에서 들어오는 액을 막아주는 존재이다. 하지만 마을의 성격에 따라 조금씩 신격이 변한다. 산촌이라면 산신을 따로 모시고 어촌은 동해지신을 모시는 등 마을의 특성을 반영하는 신이 있는 것이다. 주문진 큰서낭당의 경우 어촌이기에 해수여신을 모시는 것이라고 보인다. 또한 어촌에서는 해사를 주관하는 신이 여서낭이기때문에 진이서낭의 존재 역시 특별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조선조 유명한 유학이자 관료였던 우복정경세가 마을의 서낭으로 좌정해있다는 것은 매우 예외적이다. 삼년두리로 3월이 되면 무당을 불러 큰굿을 하는 주문진 큰서낭당에 유학의 거두가 신으로 좌정해있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절로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는데 이에 관해서는 마을에 전승되는 비장하고 한편 흥미로운 신화가 있다.
 옛날 주문진에 진이라는 처녀가 살았다. 미색이 남달랐는데 어느 날 현감이 보고 반해 수청을 요구했다. 진이가 불응하자 현감은 아버지와 오빠를 옥에 가두었다. 자기 때문에 아버지와 오빠가 험한 일을 당하자 진이는 고방에 들어가 삭발하고 아들을 낳은 뒤 자살했다. 진이가 죽은 뒤부터 마을에는 사고가 잦았고 고기가 잡히지 않아 어민들이 곤경에 처했다. 아무래도 진이의 억울한 죽음 때문이라는 생각을 한 주민들은 진이의 넋을 위로하는 제사를 지내주었다. 그 후로 마을에는 다시 평화가 찾아왔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마을에서 진이의 억울함을 풀어주었다는 것으로 우복이 서낭이 될만한 사건이 없다. 그런데 주문진 큰서낭당에는 또 다른 전승이 있는데 바로 이 대목에서 우복정경세가 등장한다. 즉 진이가 죽은 뒤 마을이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우복이 부임했다. 다만 전승하는 이야기 속의 우복은 강릉부사가 아니라 현감으로 등장할 때가 많다. 부임한 우복은 전후사정을 들은 뒤 마을이 황폐한 원인이 진이의 억울한 죽음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제사를 지내주었다. 진이가 제사를 받은 후부터 어촌에는 다시 평화가 찾아왔다. 그리고 진이와 우복정경세는 마을의 서낭신으로 좌정했다는 것이다.

 억울한 죽음을 당한 젊은 여인이 해사를 관장하는 마을의 서낭신으로 좌정하는 것은 동해안지역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바위에서 미역을 따다가 파도에 휩쓸려 죽은 뒤 서낭이 되었다는 삼척 해신당 전승이 대표적이다. 자연과의 갈등에서 패한 여인의 한을 달래주기 위해서 공동체가 신으로 모시는 이야기다. 하지만 진이서낭은 어촌에서 흔한 바닷사고로 죽은 존재가 아니다. 진이는 도저히 이길 수 없는 권력층과의 싸움에서 더 이상 자신을 지키기 어렵다고 생각하자 스스로 목숨을 끊은 당찬 여인이다. 심지어 아들도 낳았으니 미혼모라고 할 수 있다. 전통사회에서 좀체 보기 어려운 심지 굳은 여인이 신으로 좌정한 경우라서 매우 특별한 것이다.
 그런데 현지 주민들은 진이서낭의 진이라는 이름을 고유명사가 아니라 보통명사로 인식하고 있다. 즉 진이는 특정인의 이름이 아니라 보통명사로 갯가, 또는 나루의 처녀라는 의미의 ‘津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현감이 진이에게 수청을 강요했다는 사실은 개인에게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주민들의 생각처럼 진이가 바닷가에 사는 여인의 상징이라면 이는 권력층이 민가의 여인에게 행한 부당한 횡포를 대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다가 현감은 진이만이 아니라 아버지와 오빠까지 옥에 가두고 괴롭혔다. 이로써 현감에게 죽을 고통을 당한 진이 가족은 힘없는 민중 전체를 대표하는 셈이고 이들의 갈등은 민중과 권력층의 대립으로 확장되는 것이다.
 아버지와 오빠에게까지 해가 미치자 도저히 현감을 이길 수 없었던 진이는 극단적인 수단으로 죽음을 택한다. 죽기 전 진이는 머리를 자른다. 흔히 삭발은 승려가 되기 위해서 하는 행동이다. 하지만 진이의 삭발은 종교적 귀의라기보다는 여성이기에 당했던 억울함과 분노를 표출하는 행위이다. 진이는 여자이기 때문에 현감의 무리한 요구를 듣게 되었다. 여자가 아니라면 그럴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진이의 삭발은 여성인 자신의 존재성을 포기함으로써 보다 구체적으로 항거를 드러내는 행동이다. 마지막으로 진이는 죽기 전에 아들을 낳는다. 진이는 여자를 거부하고 죽었지만 어머니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다른 지역 당신화에서 대부분의 여서낭은 나무로 깎은 남근(삼척 해신당)이나 소의 신(腎)(강문여서낭)을 제물로 받는 것으로 한을 푼다. 하지만 진이서낭은 이러한 제물을 받지 않는다. 남녀의 조화를 이루지 못한 여인이 아니라 이미 자식을 낳은 어머니이기에 스스로 풍요의 여신이 된 것이다.


 진이신화 두 번째 전승에서는 진이가 한을 풀고 서낭으로 좌정하는 과정에서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 1563-1633) 부사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우복은 유성룡의 문인으로 주자학에 본원을 두고 경전에 밝았으며 특히 예학에 조예가 깊었다고 알려져 있다. 경상감사, 영해부사, 대구부사를 지냈고 1623년 인조반정 이후에는 형조판서 예조판서 이조판서 대제학 등의 관직을 두루 거쳤다. 우복은 1613년 4월부터 1615년 9월까지 강릉대도호부사로 재직했다. 재직기간동안 특별히 풍속을 교정하는데 힘썼고 그 공을 잊지 않은 강릉의 유학들이 1823년 연곡면 퇴곡리에 추모사당인 우복사를 건립하였다. 우복사 비문에 의하면 우복이 부임하여 풍속을 교정하는 행정으로 민속이 돈후하고 예교가 갖추어졌다고 하였다. 이런 큰 인물이 과연 진이의 한을 풀어주기 위해서 제사를 지내주었을까? 하지만 마을에서는 이를 굳게 믿을 뿐 아니라 후에 서낭신으로 모시기까지 하여 오늘에 이른 것이다. 한적한 어촌의 서낭신으로 좌정해 있다는 현실은 유학에 조예가 깊을수록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사실여부와 무관하게 우복의 등장은 신화를 형성하는 일종의 메커니즘이 작동한 결과로 볼 수 있다.
 억울하게 죽은 당신화의 주인공은 자신의 한을 공론화시키기 위해 해코지를 하게 된다. 어촌에 사고가 많이 나고 흉어가 드는 것이 바로 이들이 억울함을 알리기 위해서 하는 해코지이다. 이는 억울한 죽음의 원인이 사회현실의 부당성에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런데 해코지를 하는 원혼은 결국 피해를 입는 마을공동체와 대립하게 된다. 둘이 화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매개자가 필요한데 이는 대개 공동체에 영향력을 가진 남성으로 나타난다. 우복은 바로 여기에 해당하는 인물인 것이다. 물론 훌륭한 관리로서 명성을 떨친 그의 평판이 중개자로 선택받는 계기가 되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겠다.
 진이서낭 신화는 전형적인 관탈민녀형 설화에 속한다. 백제시대의 도미설화나 춘향전과 같은 계통의 이야기인 것이다. 그런데 신으로의 좌정과정은 춘향전의 근원설화와 상당히 유사하다. 김종철은 “춘향전의 근원설화” 라는 글에서 춘향전의 근원과 발생설화를 밝힌 바 있다. 내용을 보면 남원부사의 아들 이도령이 동기 춘양을 좋아했는데 뒤에 춘양이 이도령을 위해 수절하자 새 사또 탁종립이 죽였다는 것이다. 호사자가 이를 슬퍼하여 타령을 지어 춘양의 원을 풀고 그 정절을 표창했다고 한다. 특히 마지막에 호사자가 타령을 지었다는 내용은 춘향전의 발생설화라고 보았다.
 김동욱도 [춘향전 연구]에서 비슷한 내용을 춘향전의 근원설화로 밝힌 바 있다. 박색인 퇴기의 딸 춘향이 이도령을 위해 수절했는데 춘향이 죽은 뒤 남원에 흉재가 들었다. 양진사가 백지 3장에 춘향사설을 지어 광대로 하여금 노래부르게 하고 기우제를 지냈더니 비가 왔다고 했다.

 진이서낭의 좌정담과 춘향전의 근원설화 구조는 상당히 유사하다. 먼저 인물구도를 보면 진이가 현감이 수청을 요구하기 이전 다른 남자를 좋아했다는 것은 이야기 속에 밝혀져 있지 않다. 하지만 후에 아들을 낳은 것으로 보아 이미 사랑한 남자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춘향전처럼 삼각관계를 이루는 인물구도가 명확히 드러나지는 않지만 진이와 현감이 만나기 전부터 다른 남자가 존재했음을 부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진이는 춘향(춘양)이와 일치하는 인물이고 진이에게 수청을 강요한 현감은 변사또(또는 탁종립), 그리고 이도령에 해당하는 인물은 숨어있지만 나중에 진이가 낳은 아들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한다.
 타령을 지어 춘양의 넋을 위로한 호사자, 그리고 백지 3장에 춘향사설을 지어 읽었던 양진사는 진이서낭 신화 속의 정우복과 일치한다. 세 사람 모두 여주인공의 한을 풀어주고 그 억울한 내용을 널리 알려 사회적 재판을 받게 한 존재들인 것이다. 이들은 또한 식자층이고 지배계층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춘향이의 내력이 판소리 광대들에 의해 민간에 퍼져 알려진 것처럼 진이서낭의 억울함과 해소과정은 해마다 지내는 당제를 통해 민중의 삶 속에서 재생산된다는 점도 유사하다고 하겠다. 주문진 진이서낭은 관의 횡포에 죽음으로 맞선 용감한 여인이다. 진이의 용기는 나중에 서낭신으로 좌정하는 것으로 보상받는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가해자와 같은 통치계급에 속하는 강릉부사의 도움을 받음으로써 당시 시대적, 현실적 한계를 반영하고 있다.
 지금도 주문진 큰서낭당에서는 3년두리로 굿을 한다. 음력 3월 3일을 기점으로 어촌계가 주관하는데 소 한 마리를 잡는 전통을 지금도 이어가고 있다. 당이 워낙 크고 주변 경관이 수려하여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기도 하다. 지난 가을 문득 찾아간 서낭당에서 낯선 풍경을 보았다. 이름 모를 무당이 대동굿을 한다는 현수막이 크게 걸려있는 것이었다. ‘벼락신궁 무녀와 신도회 주관’이라는 것을 보아서는 신들린 무당이 서낭당을 빌어서 하는 굿인 모양이었다. 그런데 대동굿, 햇곡맞이라면서 마치 마을에서 하는 굿처럼 당당하게 걸려있는 현수막을 보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돌이켜보니 얼마 전에 현장학습차 서낭당에 왔을 때도 낯선 무녀가 서낭당 문을 활짝 열어놓고 푸닥거리를 하고 있었다. 주문진 큰서낭당에서는 대대로 세습무가 주관하여 풍어를 비는 서낭굿을 해온 곳이다. 개인적으로는 새로 배를 진수하거나 험한 사고를 당한 어민들이 찾아와 소원을 빌고 아픈 마음을 달래는 신성한 장소이다. 마을의 수호신을 모시는 공동체의 서낭당이 이제 개인신당으로 쓰이고 있는 현장을 보면서 어쩌면 이것이 현재 우리 무속문화의 모습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