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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관령 옛길을 내려오면 왼쪽 산 아래 강릉 3대 평야의 하나인 금산평야가 펼쳐진다. 넓은 논 뒤로 크고 작은 기와집이 여유있게 늘어서 있는데 바로 겡금, 갱금이라고 부르는 건금마을이다. 행정으로는 강릉시 금산2리이다. 고속도로가 나면서 금산평야는 논이 많이 줄었다, 하지만 여전히 가을이면 황금빛으로 출렁이는 금산평야는 주렁주렁 빨간 감을 매달고 있는 감나무와 어울려 더욱 풍요롭게 보인다. 금산평야 옆으로 강릉의 젖줄, 남대천이 흐르고 있어 건금마을은 농촌으로서 최고의 조건을 갖추었다 할 것이다. 건금마을은 논농사를 주로 하는 근본있는 농촌이다. 현재 120여 가구가 살고 있는데 삼분의 일 정도가 토박이다. 건금마을에는 유난히 정정한 노인들이 많다. 지금도 노인회관에 가면 50여 명의 노인들이 모여 함께 점심을 먹고 운동을 하거나 바둑을 둔다. 이처럼 노인들이 건강하고 단합이 잘되는 마을공동체의 전통은 일제강점기 전승이 중단되었던 “용물달기”를 다시 살리는 기폭제가 되었다. 건금마을은 2005년 농촌건강장수마을로 선정되었는데 그 사업의 하나로 용물달기를 복원한 것이다. 그 후 지금까지 주민들이 용물달기 놀이를 전승하고 있다. 농사를 짓는데 물처럼 중요한 것이 없다. 그래서 전국적으로 정월에는 물을 확보하기 위한 주술적 민속들이 전승되고 있다. “용알뜨기”가 대표적인 민속이다. 용알뜨기는 정월 대보름 이른 새벽에 아낙들이 동네 우물을 다니면서 제일 먼저 물을 떠서 자기네 집 우물에 붓는 풍속이다. 아무도 오지 않은 우물의 첫물을 뜨면 용의 알을 떴다는 의미에서 짚 한 올이나 똬리를 던져둔다. 그러면 그 뒤에 온 사람은 용알을 뜰 수 없다. 이렇게 세 곳 우물의 용알을 뜨면 한 해 동안 물이 풍족하고 농사가 잘된다고 믿었다. 하지만 용물달기는 물을 확보하기 위한 주술적 놀이로 건금마을 고유의 민속이라고 볼 수 있다. 특히 건금마을의 유지였던 강릉김씨 임경당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련이 있다. 건금(建金)이라는 이름은 강릉김씨 집성촌으로 강릉김씨가 세운 마을이라는 뜻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그런데 건금마을이 강릉김씨 동족마을이 된 것은 임경당(臨鏡堂)을 지은 김열의 아버지 김광헌이 살면서부터라고 한다. 김광헌은 진사벼슬을 했으나 중종 13년(1519년)에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낙향하였다. 이때 김광헌이 심었다는 수령 5백여 년의 은행나무가 지금도 살아있다. 임경당은 건금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로 강원도지방 유형문화재 제 46호로 지정되었다. 조선조 선조 때 학자 김열이 지은 별채로 자신의 호를 붙여 임경당이라고 이름지었다. 율곡 이이는 김열이 아버지 김광헌이 심은 수백 그루의 소나무를 잘 가꾸는 모습을 칭찬하면서 호송설(護松說)이라는 글을 지어주었다. 김열은 과거에 나가지 않았고 벼슬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강릉 향현사 12현의 한 분으로 추앙받은 인물이다. 용물달기는 바로 이 임경당에서 전승해오던 정월 민속이다. 정월 대보름 이른 새벽에 임경당에서 일하는 머슴들이 짚을 꼬아서 만든 용을 끌고 이웃의 샘을 찾아다니면서 물을 떠 와 임경당의 용천수에 부었는데 이를 ‘용물달기’라고 불렀던 것이다. 항생골, 솔밑골, 둔지샘 세군데의 물을 달아왔다고 한다. 샘에 도착하면 용이 물에 완전히 젖을 때까지 푹 담궜다가 꺼내서 용잡이가 그 용을 질질 끌고 임경당까지 갔다. 따라간 사람들은 바가지나 주전자에 물을 뜬다. 용이 앞장을 서서 임경당으로 갈 때 사람들은 뒤따르면서 손으로 용에게 물을 뿌린다. 이때 큰 소리로 “용아 용아 물달아라, 용아 용아 물달아라” 노래를 부르면서 왔다는 것이다. 물에 적신 용을 땅에 끌고 왔다는 점에서 우물의 물줄기를 끌어온다고 인식한 것을 알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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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물달기’란 명칭은 용이 물을 달고 온다는 의미에서 기원한 것으로 보인다. 물을 떠서 임경당으로 돌아올 때 용을 들고 가는 앞의 사람이 ‘오나?’ 하면 뒤에서 물을 운반하는 사람이 조금씩 물을 땅바닥에 흘리면서 ‘온다!’ 또 ‘오나?’ 하면 ‘온다!’ 라고 말을 주고받는다. 또한 “용아 용아 물달아라! 용아 용아 물달아라!” 라는 노래에서 용물달기라는 명칭이 유래된 것으로 짐작한다. 용물달기는 외부에 있는 우물물을 길어 자기네 집 우물에 넣음으로써 일 년 내내 농사지을 물이 풍족하고 만사가 형통하기를 바라는 기원에서 생긴 민속이다. 대개 이런 민속은 개인적으로 한밤중에 조용히 이루어지는데 부유한 임경당에는 머슴들이 많아서 규모가 커졌고 정월 민속놀이의 하나가 된 것으로 보인다. 임경당에 있는 용천수는 물이 좋아서 마을사람들이 공동으로 사용하였기에 주민들의 참여도 활발했다. 건금마을에서 상당히 비중있는 임경당의 사회적 위치도 용물달기가 단순히 한 집안의 행사가 아니라 마을 전체의 놀이가 되는데 일조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건금마을에서는 임경당 뿐만 아니라 공개적으로 남의 우물의 용알을 떠오는 민속이 제법 활성화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정월대보름 새벽이 되면 집안에 우물이 있는 사람들은 행여 다른 사람들이 자기네 우물의 용알을 떠갈까봐 밤새 지키곤 했다. 남의 집 우물을 찾아와 용알을 떠가려는 사람들과 이를 지키려는 사람들 간의 긴장과 갈등이 용물달기 같은 싸움놀이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용물달기는 상수도가 들어오고 머슴문화가 사라지면서 자연스럽게 전승이 중단되었다. 그 후 용물달기는 1997년 전국민속예술축제에 출전하여 국무총리상을 수상한 것을 계기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렇지만 당시 고증에 문제가 제기되어 마을에서의 전승은 이어지지 못했다. 용물달기의 용은 한 마리인데 당시 공연에서는 두 마리로 만들어 싸우는 내용으로 연출을 했던 것이다. 2006년 장수사업을 계기로 본래 모습을 찾아 다시 시작한 용물달기는 지금까지 어려운 여건가운데서도 마을 주민들이 전승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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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부터 새롭게 마을에서 전승해온 용물달기는 여러 면에서 변화를 겪는 중이다. 첫 번째 변화는 용의 형태이다. 우물안에 넣을만한 크기라면 용이 클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요즘은 용을 땅에 끄는 것이 아니라 장정들이 어깨에 메고 행진을 한다. 자연스럽게 용이 커질 수밖에 없다. 심지어 입에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을 만들기도 했다. 건금마을 용물달기는 인기가 있어서 단오제와 망월제를 비롯한 강릉시의 여러 민속행사에 초청을 받아 공연하고 있다. 마을을 떠나 외부에서 공연을 하면서 용은 더욱 커졌다. 거기에 불을 지핀 것은 동계올림픽이다. 나라의 지원을 받아 만든 용은 중국식 화려한 용으로 바뀌었다. 수십 명이 달려들어 그 용을 어깨에 메고 신나게 행진을 한다. 결국 짚으로 소박하게 만들어 땅에 질질 끌었던 용물달기의 용과는 완전히 멀어지게 되었다. 그나마 마을에서 용물달기를 할 때는 작은 용을 사용하여 전통을 이으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 두 번째는 탈맥락의 문제이다. 한밤중의 행사는 사람들의 참여를 위해서 낮으로 바뀌었다. 원래 세 군데 우물에서 물을 달아왔으나 우물을 사용하지 않으면서 물길이 막혀 이제는 한군데로 줄었다. 대신 용을 메고 마을 전역을 행진하고 있다. 시간과 공간이 바뀐 것이다. 행사내용도 변화가 크다. 연원이 불분명한 임경당의 용천제는 유교식으로 더욱 강화되었고, 임경당 마당에서 농악을 하고 떡메치기 놀이를 하는 등 규모를 키웠다. 사실상 용물달기를 1960년대 이전 오로지 하늘에 의지하여 물의 풍요를 기원했던 당시의 모습으로 되돌리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물론 지금도 가뭄이 들면 농사가 어렵지만 마을에서 농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많이 줄어들었고 더 이상 먹을 물이 부족한 시대는 아니다. 수도를 사용하면서 이제 마을에는 놀이 전승의 바탕이 되었던 우물도 없다. 용물달기의 주역이었던 머슴문화가 사라진지 오래인데다가 주민 대부분이 연로하여 예전처럼 한밤중에 놀이를 전승할 가능성은 매우 약해 보인다. 그렇지만 주민들은 정월보름에 마을에서 이런 행사를 벌이는 것에 자부심을 갖고 있다. 오후부터 저녁까지 임경당 마당에서는 농악을 비롯하여 떡치기 등 각종 민속놀이가 벌어지고 밖에서는 오랜만에 찾아온 손님들과 함께 산더미같이 쌓인 삼겹살을 구워 먹으면서 행복한 축제를 만끽한다. 시대의 변화와 함께 민속의 내용이 변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추세이다. 마을에서도 사회의 변화를 인정하면서 가능한 탈맥락화를 지양하는 수준에서 용물달기가 전승될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 그리하여 마을사람들의 삶 속에서 긴 역사를 지닌 소중한 문화유산이 맥을 잇기를 열망하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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