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과 들, 강과 바다 그리고 허공이란 공간에 시간이 흐르면서 오늘을 살던 사람이 어제의 사람이 되고 오지 않은 내일이 오늘이 되어 새로운 사람이 새날이란 시간과 주변이란 공간에 삶을 엮은 것이 훗날이 되었을 때 이것을 흔한 말로 역사(歷史)라 하고, 이를 연구하는 학문을 역사학(歷史學)이라 한다.
 이 역사라는 명사가 갖고 있는 의미에는 시간과 공간 그리고 인간이 남긴 유·무형의 흔적들을 포괄하는 모든 것이 문화유산을 뜻한다. 우리 주변의 모든 문화유산은 각기 의미를 내포하고 있지만 일부에는 다른 문화유산이 갖지 않는 매우 뜻깊은 속성을 갖는 예가 있다. 그 예가 바로 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의 사리탑인 「지광국사현묘탑」이다.
 지광국사(智光國師, 984;성종 3~1067;문종 21)는 법명이 해린(海麟)이고 자는 거룡(巨龍)이며 원주사람으로 속성은 원씨(元氏)이다. 스님은 전국의 여러 사찰을 옮겨 다니며 수행하였고 스님의 사리탑 옆에 세운 비문의 뒷면에는 승통과 수좌를 비롯한 1,300명이 넘는 제자를 배출하였다고 한다.
 지광국사는 대사(大師)와 중대사(重大師) 및 삼중대사(三重大師)를 거쳐 승통(僧統)과 왕사(王師) 그리고 승려 최고의 직위인 국사(國師)에 이르러 당대 최고의 고승으로 추앙받았다. 이러한 고승으로서의 품격에 걸맞게 지광국사가 입적하자 스님의 사리를 모신 사리탑(舍利塔)과 국사의 생애를 기록한 사리탑비(舍利塔碑)가 원주 법천사에 건립되었다. 사리탑은 고려시대 500여년 동안에 건립된 부도를 통틀어 가장 멋진 사리탑으로 정평이 나 있고 사리탑비 역시 한국 탑비로서 가장 아름다운 비석으로 자리매김하였다. 사리탑과 사리탑비의 석조미술사적 가치는 주변 정보망에서 흔히 접할 수 있어서 이 자리에서 설명한다는 것은 군더더기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이에, 지광국사의 사리탑, 즉, 지광국사의 부도를 왜 고려시대를 통틀어 가장 멋지고 독특한 양식으로 건립하였을까 하는 점이다. 신라가 붕괴되기 시작하는 800년대 초에 당나라에 유학한 많은 승려들에 의해 남종선(南宗禪) 불교가 전래되어 전국에 유포되었는데 이를 9개의 사찰을 의미하는 구산선문이라 하였다. 그런데 9개의 사찰에 관련된 여러 스님들이 입적하였을 때에 영월 흥녕선원에서 사자산문을 개산하는 징효절중 스님만이 다비(茶毘=화장)를 하고 이외의 모든 스님은 시신을 땅에 묻는 매장의 방식으로 장례를 치렀다. 이러한 장례풍습은 고려초기까지 지속되다가 1067년에 입적하는 지광국사부터 시신을 불에 태우는 화장 즉, 다비라는 예법으로 장례를 치르게 되었다. 다비하는 절차에서 스님의 육체는 불에 타지만 끝까지 타지 않고 남은 결정체를 사리(舍利)라 한다. 이 사리를 모아 탑이라는 석조물로 조각하여 세우게 되었는데 고려시대에 처음으로 다비를 하고 건립한 부도가 원주 법천사 지광국사 사리탑이다. 지광국사란, 해린 스님이 입적하자 당시 임금인 문종이 지광(智光)이라는 호를 내리고 사리탑은 현묘(玄妙)라는 사리탑의 이름을 지어주었다.
 사리탑의 외형을 보면 신라시대말부터 고려시대 초기까지는 화순 쌍봉사에 건립된 철감선사의 사리탑과 같이 팔각형의 건물을 모방하였다. 이는 기단부에서 탑신부, 그리고 지붕을 상징하는 옥개석까지 모두 팔각형으로 만들어 지다가 지광국사 사리탑에서 처음으로 기단부에서 옥개석에 이르기 까지 사각형으로 변화되었다. 그리고 사리탑의 각 부분에 다양하고 섬세한 문양을 가득 새겨서 무척 화려하게 꾸몄다.
 그런데 이와같이 아름다운 사리탑은 사리탑비와 함께 법천사의 가장 높은 위치인 탑비전(塔碑殿)이란 공간에 건립되었으나 사리탑비는 크고 해체하기 어려워서인지 일본인들은 사리탑만을 서울로 옮겨가게 되었다. 사리탑은 기단부에서 상륜부까지 수많은 여러 개의 작은 돌로 다듬어 만들었기 때문에 해체하기 쉬웠고 무게가 가벼워 옮겨가기 쉬웠기 때문일 것이다. 이 사리탑은 1911년경에 서울로 옮겨지고 다시 바다를 건너 일본까지 반출되었다가 서울로 다시 돌아 왔으나 서울에서도 정착하지 못하고 여러 곳을 전전하다가 경복궁의 정원에 머무르게 되었다. 그런데 일제로부터 해방되고 몇 년이 지나지 않은 1950년에 뜻하지 않은 한국전쟁이 벌어지고 경복궁은 전쟁터로 바뀌게 되었다. 이때 지광국사 현묘탑은 폭탄에 맞아 사진, 〔한국전쟁 시기에 폭격으로 파괴된 지광국사 사리탑〕에서 보는 것처럼 수많은 조각으로 파괴되었다.
 이후, 국가에서 과학적 분석을 거쳐 해체하고 오랜기간 복원 과정을 거쳐 110년만에 원래의 고향인 원주 법천사로 돌아오게 되었다.
 2000년 봄, 춘천 소양로에 있는 춘천7층석탑을 문화재청에서 해체수리할 때, 석탑에 봉안되었던 사리와 사리함이 일본인들에 의해 도난되었음을 알게 되어 관계기관에 승인을 받아 미얀마에서 이운해 온 부처님 진신사리 3과를 봉안하는 인연을 갖게 되었다. 이 때 청평사 주지 청화(靑華) 스님께서 법상(法床)에 올라 사리봉안식을 위해 모인 200여 명의 참석자에게 다음과 같은 법어(法語)를 설하셨다.
 그렇다. 문화유산은 있던 원래의 자리에 원래의 모습으로 있어야 한다. 그래야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과 주변의 환경이 과거의 시간과 공간이 함께 호흡하면서 오늘의 우리에게 온기를 전하는 것이다.
 예전에 일본인들에 의해 경복궁으로 옮겨졌던 여러 문화재들이 고향으로 환원하는 일이 여러 번 있었다. 그 때, 칠곡 정도사지 5층석탑은 고향으로 가지 못하고 국립대구박물관에 머물고, 광양 중흥사 쌍사자석등 역시 고향으로 가지 못하고 국립광주박물관에 머물고 있다. 원주 거돈사 원공국사승묘탑과 흥법사 진공대사탑은 현재도 국립중앙박물관에 머물러 있다. 현실적 여건이 되지 않아 원래의 자리로 돌아갈 수 없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여건이 마련되었다면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야 한다. 물론 ‘서두르지 않는 범위 내에서’라는 전제가 있어야 한다.
 하였다. 이제, 현묘탑비에서 노래한 바처럼 비문이 영원하듯이 스님의 사리탑인 현묘탑도 고향으로 돌아 영원히 빛나게 되었다. 이렇게 지광국사 현묘탑이 고향으로 돌아 올 수 있었던 것은 원주시민과 관련 전문가 그리고 관계 당국의 많은 노력, 여기에 배려라는 또다른 서로의 타협이 있었기에 이루어진 일이다.
 지광국사 현묘탑의 환지본처는 참으로 기쁜 일이다. 그러기에 앞으로도 환지본처가 가능하도록 꾸준히 여건을 만들어 본래의 자리를 떠난 여러 문화유산이 환지본처하기를 희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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