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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상에 태어난 모든 생명은 유한하여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죽음이란 현실을 맞이하게 된다. 인도에서 ‘브라만/크샤트리아/바이샤/수드라’라는 수직적 계급사회를 극복하고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라는 불교를 창시한 고타마싯달타 역시 불도(佛道)를 깨우쳤음에도 불구하고 생물학적 죽음을 극복하지는 못하였다. 부처님의 제자가 되어 세상의 인연을 끊고 출가(出家)라는 엄정한 생활을 하여 깨달음을 얻은 고승도 죽음이라는 현실은 맞이하였다. 인간은 일생을 마치면 시신을 땅속에 묻는 매장(埋葬)을 하거나 최근 상례(喪禮)를 치름에도 장례(葬禮)예식장이라 잘못 부르는 곳에서 장례 이전의 의식을 치르고 안식원이라는 곳에서 화장이라는 엄숙한 절차를 거쳐 시신을 정리한다. 승려도 죽음을 맞이하면 장례라는 절차를 거치게 되는데 이를 다비(茶毘)라 하고 일반인과는 달리 다비를 마치면 습골(拾骨)이라는 절차를 거치는데 이때 불에 타지 않은 사리와 뼈를 수습한다. 이렇게 모은 사리와 유골은 특정한 양식으로 묘탑을 건립하여 그 속에 봉안하게 된다. 부처님의 사리를 모신 묘탑은 불탑(佛塔)이라 하고 승려의 사리를 모신 묘탑은 부도(浮屠)라고 부르고 있다. 최근에는 승려의 부도를 불탑과 구별하기 위한 의도에서인지 승탑(僧塔)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불교가 처음 전래되는 신라와 백제는 전통적으로 기단부부터 상륜부까지 사각형으로 나무로 만든 목탑이나 돌로 만든 석탑을 건립하고, 고구려는 팔각형의 목탑을 건립하였다. 고구려 목탑은 전하는 것이 없지만 평양지역의 절터를 발굴한 결과 8각형의 불탑 기단부가 여럿 조사되었고 백제와 신라에서는 미륵사지 석탑과 불국사 석탑과 같이 4각형이 전형이 되어 조선시대까지 대부분의 석탑이 이러한 양식을 따랐다. 예외적으로 평창 월정사 팔각구층탑, 남양주 수종사 팔각오층탑이 있고 화순 운주사에 탑신이 둥근 원탑(圓塔)이 있지만 이러한 예는 많지 않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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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말에 교종(敎宗)불교와 달리 참선을 위주로 수행을 하는 선종(禪宗)불교가 전래되면서 본격적으로 스님의 사리를 봉안하는 부도라는 석조묘탑을 건립하게 되었다. 이러한 묘탑은 신라와 고려 그리고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양식이 변화되는데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부도는 양양 진전사 도의국사 부도이다. 도의국사는 당나라에서 남종선을 배워 821년에 경주로 귀국하고 다시 설악산 진전사로 옮겨와 염거화상과 보조선사를 가리키며 수도 생활을 하다가 입적하여 진전사의 동쪽 언덕에 부도를 건립하였다. 그의 제자 염거화상과 보조선사의 묘탑도 건립되는데 도의선사 부도는 기단부를 사각형으로 하고 탑신부와 지붕돌은 팔각형으로 건립하고 염거와 보조의 묘탑은 기단과 탑신 그리고 지붕돌이 모두 팔각형으로 건립되면서 한국 승려 묘탑의 전형이 되었고 고려중기까지 대부분의 고승 부도가 염거와 보조선사의 부도 양식을 모방하여 건립되었다. 도의→염거→보조선사로 이어지는 스승과 제자 간의 부도를 보면 한국 부도 양식의 성립과 발전이라는 역사를 한눈에 보게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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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기단부에서 지붕돌에 이르기까지 팔각형을 기본으로 건립되던 부도가 고려 중기부터 탑신부가 팔각형에서 원형으로 변화된다. 그 예가 경주 불국사 광학대사(光學大師) 부도와 1017년(현종 8년)에 건립되는 충주 정토사지(淨土寺址) 홍법국사(弘法國師塔) 부도이다. 세부적인 면은 다르지만 부도의 중간부인 탑신이 둥근 원형이라는 특징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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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부도 양식은 후대에 계승되지 않았다. 이후 고려가 원나라와 교류가 활발해지고 인도에서 출생하고 원나라에서 많은 활동을 하면서 고려의 고승인 나옹왕사를 가르친 지공대사의 부도가 회암사에 탑신이 둥근 원형으로 건립된 이후 조선시대에 크게 유행하는 부도 양식이 되었다. 불탑은 4각과 8각의 형태로 3층과 5층 또는 7층 등 여러 층으로 건립되지만, 부도는 위의 사진에서 보는 바와 같이 기단부와 탑신부 그리고 상륜부라는 단순한 형태로 건립되었다. 이렇게 불탑과 승탑이 양식적으로 분명한 차이를 보이고 있었으나 조선시대에는 불탑과 승탑의 양식을 구별하지 않고 건립되는 새로운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승탑의 탑신부가 원구형(圓球形)으로 건립되고 이들 양식이 후대에 전승되는 것은 회암사의 지공과 나옹 그리고 무학대사 부도이다. 이들은 스승과 제자로서 법을 이어받아 이들의 부도가 회암사에 건립되었는데 회암사에는 불탑까지도 이와같은 양식으로 건립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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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지역에서 불탑이 회암사의 부도와 같이 건립되는 사례가 낙산사와 건봉사이다. 1392년, 유교의 한 분파인 성리학을 나라 경영의 이데올로기로 제시한 지식인을 중심으로 조선이 건국되고, 이들은 고려의 이데올로기였던 불교를 대체하려는 정책을 시작하였다. 이에 대응하기 위한 불교계에서는 부처님의 사리를 중시하는 신앙이 번창하게 되고 사리를 정성드려 봉안하는 사조가 유행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상은 조선 500년을 관통할 정도로 지속되었는데 이러한 사상에서 건립되는 묘탑이 양양 낙산사의 공중사리탑과 고성 건봉사의 석가여래치상탑이다. 공중사리탑은 낙산사의 홍련암 불상을 개금하기 위해 불사를 하던 중에 사리가 출현하여 사리탑을 건립하여 봉안하게 되었는데 공중사리탑비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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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구 석겸 등이 큰 원을 세워서 관음굴 위에 석탑을 만들어 신령스런 사리를 모시려고 하였는데 9년이 지나서야 공사가 비로소 끝나 이어 다음 해 계유년(1693), 여름에 대관령을 넘어 수백 리를 달려온 수춘거사에게 비명을 지어달라고 부탁하니 거사가 그 기록을 보고 한번 웃고는 바로 명을 지었는데 명은 다음과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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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낙산사 공중사리탑은 1619년에 홍련암을 중건하고 1683년에 불상을 개금하던 중에 사리 1과가 공중에서 떨어지자 이를 보관하였다가 1692년에 사리탑을 건립하고 1693년에 이를 기록한 비석을 세웠다는 것이다. 즉, 낙산사에서는 부처님의 사리가 3번이나 출현하는 이적이 일어나는데 이때 낙산사에서는 승탑을 닮은 불탑을 세웠다는 것이다. 고성 건봉사의 사리는 정유재란 때에 양산 통도사에 왜적이 침구하자 사명당 유정은 왜병에게 사리가 도난될 것을 우려하여 스승인 서산대사 휴정이 있는 금강산으로 옮겨오자 휴정은 1과(果)를 자신이 머물던 영변 묘향산 보현사로 이운하고 나머지 사리는 통도사에 다시 봉안하라고 지시하였다. 하지만 유정은 이를 이행하지 않고 건봉사, 대구 용연사에 사리를 나누어 봉안하고서 이외의 사리를 통도사로 옮겨 봉안하게 되었다. 그런데 『조선금석총람』과 『건봉사지』 등에 의하면 1605년(선조 38), 사명대사가 일본에서 되찾아 온 사리를 봉안한 불탑으로 1724년(경종 4년)에 건립하였다고 하는데 여러 자료를 종합해 보면 이는 사실이 아니다. 석가여래치상탑은 1986년 도굴범들에 의하여 도괴되어 사리가 도난당하였다가 되찾았다. 이후 1995년과 1996년 사이 석가여래치상탑을 우측 끝으로 옮기고 그 자리에 통도사 금강계단을 모방한 석종형 사리탑을 조성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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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산사와 건봉사의 불탑은 ‘사리탑(舍利塔)’ 또는 ‘석가여래치상탑’이라는 특정의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이는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봉안한 탑이라는 사리신앙의 유행에서 생겨난 것이다. 이러한 예로 인제 봉정암 5층석탑을 ‘석가사리탑’, 남양주 봉인사 사리탑(1620년)과 보은 법주사 사리탑(1710년)은 ‘세존사리탑’으로 부르고 있고 심지어 대구 용연사의 사리탑은 ‘석가여래부도’라고 하여 ‘불탑’을 ‘부도’라는 용어로 사용할 정도이다. 이렇게 조선시대에는 석탑형의 불탑이 승탑[부도] 형태로 건립되면서 완주 안심사와 청원 안심사는 각기 1759년과 1781년에 범종을 닮은 범종형으로 건립되기도 하고, 대구 용연사에서는 1676년에 통도사처럼 계단형으로 건립되는 등 다양한 변화를 보이고 있다. 이는 사리 신앙의 번창과 당대에 유행하던 승탑의 양식을 계승한 것이라 하겠다. ※ 사진은 문화재청, 고성군, 개인 블러그에서 인용하였습니다. 감사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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