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산간의 굴피집
 굴피집은 참나무나 상수리나무의 두꺼운 껍질인 굴피로 지붕을 덮은 집이다. 강원도 산간지대에서 화전(火田)을 일구던 사람들이 기와나 볏짚을 구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집을 지을 때 지붕의 재료로 너와나 굴피를 이용하였다. 너와는 200년도 더 자란 적송 토막을 도끼로 쪼갠 널쪽이다. 크기는 대중이 없지만 가로 20~30센티미터, 세로 40~70센티미터에 두께는 5센티미터 정도이다. 굴피집은 너와조차도 구하기 어려울 때 굴피로 지붕으로 이었다.
 굴피집에 시용하는 굴피는 20년 이상 자라서 적어도 지름이 30센티미터가 넘는 참나무에서 떼어낸다. 밑동에서부터 한 발 사이의 것이 가장 좋은데, 이곳의 두께는 3센티미터에 이르러 수명이 그만큼 길기 때문이다. 굴피를 떼는 시기는 물이 올라서 잘 떨어지는 음력 7월 무렵이 가장 좋다. 도끼날을 이(齒)로 삼아 나무에 대고 주욱 그어 댄 다음 도끼머리로 툭툭 치고 끝이 뾰죽한 자루 끝으로 떠낸다. 하루에 한두 짐쯤 거둘 수 있다. 집으로 옮겨 온 굴피는 4~5일 응달에 두었다가 반듯하게 펴서 차곡차곡 재어 놓고 냇돌 서너 개를 얹어서 지질러 둔다.
 굴피집 지붕이기는 9~10월에 벌인다. 한 번 덮고 나서 2~3년이 지나면 햇볕을 받았던 부분은 삭아서 갈라지므로 들어낸 다음 이 부분을 안쪽으로 넣고 안쪽의 것은 바깥쪽으로 향하도록 바꾸는데 이것이 ‘떨어 잇기’이다. 그리고 양쪽이 모두 헌것은 새것으로 바꾸어 끼운다. 굴피는 껍질 부분을 바닥으로 해서, 두 겹으로 끝이 겹쳐지도록 깔아 나간다. 처마 쪽에서부터 지붕마루 쪽으로 올라가며 이으므로 그 모양은 물고기 비늘처럼 된다. 그리고 바람이 불 때 날리지 않도록 서까래 굵기의 나무로 듬성듬성 질러 놓고 다시 냇돌을 얹어 둔다. 8칸 집 지붕에는 200짐의 굴피가 들어간다.
 굴피로 지붕을 처음 덮었을 때에는 누른 흙빛이 돌다가 점차 세월이 지나면서 검은빛으로 바뀐다. 굴피집은 여름에 덜 덥고 겨울에 덜 추운 장점은 있으나 나무껍질을 한 가지 꼴로 떠내기 어렵기 때문에 지붕은 흡사 누더기를 걸친 것처럼 지저분한 느낌을 주게 마련이다.
 굴피는 대기가 건조하면 바싹 오므라들어서 군데군데로 하늘이 보이지만 습도가 높아지면 이내 늘어나서 그 틈을 메운다. 따라서 여러 날 비가 내리지 않은 때에는 집 안의 연기가 굴피 틈 사이로도 빠져나가므로, 멀리서 보면 온 집이 불길에 휩싸인 듯한 느낌을 준다. 굴피 지붕의 수 명은 매우 긴 편으로 ‘기와 만 년에 굴피 천 년’이라는 말이 전한다.
 굴피집의 벽체는 흔히 귀틀로 꾸민다. 둥근 나무의 좌우 양쪽을 도끼로 우묵하게 발라낸 다음 우물 정(井)자 꼴로 귀를 맞추어 가며 쌓아올리고 그 사이를 진흙으로 메워서 벽체로 삼는다. 이러한 집을 ‘귀틀집’이라 따로 부르기도 한다. 귀틀을 짜는 통나무의 굵기는 15~20센티미터이며 나무와 나무 사이에는 진흙을 발라 메우므로 바람 한 점 새지 않는 훌륭한 벽이 된다. 그러나 나무의 길이에 한정이 있는 까닭에 3칸 크기의 집일지라도 방 2칸만을 귀틀로 짜고 부엌 따위의 나머지 공간은 널쪽이나 수숫대 따위로 둘러서 꾸미기도 한다.
 굴피집이나 너와집의 굴뚝은 나무 굴뚝이다. 굵은 참나무를 길이로 반 쪼갠 다음 가운데를 후벼 파낸 다음 다시 맞추고 철사 따위로 감아 개자리에 박는 것이다. 이밖에 나무 가운데에 숯불을 올려놓아서 불에 탄 부분을 긁어내는 방법을 쓰기도 하는데 굴뚝이 오래가는 장점은 있으나 만드는 데에 시간이 워낙 많이 걸린다.

 산속 굴피집에 사는 마지막 화전민
 마지막 화전민 정상홍 노인은 강원도 삼척시 신기면 대평리 사무곡 산기슭에 산다. 100세를 바라보는 노인은 4살 때 이곳으로 이사를 왔다. 화전으로 밭을 일구어 농사를 짓기 위해 산속으로 들어왔다. 그러나 일제의 수탈정책에 농사지은 것을 모두 공출로 바치고 콩기름을 짜고 남은 찌꺼기, 수수 등으로 하루하루를 살아야 했다.
 산골 마을에는 산을 깎아 만든 경사진 곳에 옹기종기 15호의 집들이 있었다. 그러나 1976년부터 녹화사업을 위해 화전을 단속하기 시작하면서 삶의 터전을 잃고 하나둘씩 마을을 떠났다. 화전민 정리 정책으로 모두 도시로 가기 위해 산을 내려갈 때 노인은 오히려 산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굴피집을 짓고 그곳에서 살았다. 지금은 화석처럼 유일하게 한 채의 굴피집이 남아있고, 그 집에 한 노인이 살고 있다. 비바람을 견디며 홀로 산을 지키는 낙낙장송(落落長松)처럼 산에서 살고 있다.
 노인이 지은 굴피집은 당시 최선의 선택이었다. 산골 마을은 모두 너와집이 많았다. 그런데 소나무가 귀해지면서 굴피집으로 바뀌게 되었다. 노인이 터를 구입하여 처음으로 집을 지을 때는 초가집이었다. 산골 마을의 초가집은 볏짚으로 지은 농촌 마을의 초가집과는 달리 보리짚이나 억새풀로 이엉을 만들어 이었다. 그러나 3년이 지나 비가 스며들기 시작하면서 굴피집으로 바뀌었다. 주변에는 소나무는 귀한 대신 참나무가 많았기 때문이다.
 화전으로 일군 밭에서 노인은 열심히 농사를 지었다. 농사를 해서 1년에 보리를 30가마, 콩 30가마 정도 하고 좁쌀도 10가마 생산하였다. 그리고 고추 3백 근, 마늘 100접을 수확했으며, 곶감도 100접이나 생산하였다. 소도 먹였으나 소는 동생의 사업 밑천이 되었다. 소를 팔 때 피눈물이 흘렀지만, 가족을 위해 그는 희생했다. 지금도 주인 잃은 마구간은 모든 것을 다 내어준 노인의 마음처럼 텅 비어 있다.
 소가 없는 지금은 순전히 노동으로 농사를 짓는다. 괭이로 밭을 쪼아 갈고, 씨를 뿌리고, 호미로 밭을 매고 수확한다. 산짐승들이 많아 그들의 피해를 막기 위해 고라니가 먹지 않는 들깨와 들쥐가 먹지 않는 옥수수, 그리고 멧돼지가 먹지 않는 팥을 주로 심는다. 곶감도 예전 같지는 않다. 계피나무를 심어 그 열매를 한약재로 팔아 생활의 일부를 충당하고 있다. 그리고 농사지은 것은 삼척 중앙시장에서 장사하던 아내에게 가져다주어 팔았다. 고추, 마늘, 그리고 약초와 산나물 등이 주요 생산물이다. 그것으로 손자 손녀 용돈을 주고 소주 한 병 사서 올라오는 것이 일상이다.
 노인은 배움에 대한 한이 있다. 학교는 멀리 떨어져 있어 갈 수 없었지만 마을에는 서당이 있었다. 그러나 글을 배우는 것은 맏아들에게만 허용되었다. 둘째 아들로 태어난 그는 글을 배우지 못하고 가족을 위해 일만 했다. 배우지 못한 한을 자식에게 물려주지 않기 위해 아들들을 삼척 시내로 내려보내 학교를 보냈다. 어머니가 손자들 뒷바라지를 위해 함께 시내로 내려가셨다. 그리고 1993년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는 부인이 삼척 시내로 내려갔다. 이후 부부는 별거 아닌 별거를 하게 되었다.
  노인은 22세에 19세의 신부를 맞이하였다. 어린 신부의 산속 생활은 힘들었다. 군 복무 중에 사망한 맏아들 대신 부모님을 모시고 살았다. 그리고 남편이 27세에 군대를 가자 며느리는 신랑이 없는 시집에서 어려운 시집살이를 해야 했다. 시부모를 모시고 세 명의 여동생과 남동생을 키우느라 고생했다. 신부에게 산골 생활에서 행복한 기억은 없다. 그래서 자식을 공부시키기 위해 삼척 시내로 내려온 이후 다시는 산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노인도 아내를 따라 잠시 삼척 시내로 내려간 적이 있지만 도시의 삶에 적응하지 못하고 다시 산으로 돌아왔다.
  몇 년 전 아내는 세상을 떠났다. 산을 내려가 병원에서 3달간 병간호를 했다. 고생한 아내를 위한 마지막 배려였다. 아내를 하늘나라로 올려보내고 노인은 산으로 올라왔다. 부모가 계시는 굴피집 옆 산소 가에 자신이 묻힐 묘터를 마련하였다. 평생 병원을 가지 않았고, 약을 먹어 본 적도 없는 건강한 삶을 살고 있지만 항상 죽음을 담담한 마음으로 준비하며 살고 있다. 아들딸은 굴피집의 유일한 소통 도구인 옛날 유선 전화기를 통해 하루에 한 번씩 통화를 한다. 길이 험해 자주 올라오지 못하는 대신 목소리로 아버지의 안부를 확인하고 있다.
 현재의 노인의 삶은 단순하다. 농사일도 많이 줄였다. 필요한 만큼 채소와 깨 농사를 짓는 것 이외는 욕심과 함께 농사일도 내려놓았다. 일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하루를 살아가는 일이다. 굴피를 뜨고 땔감 나무를 하는 것, 장작 패기와 물을 길어 오는 것이 그것이다. 한여름 보름 정도 제외하고, 언제나 아궁이에 불을 지펴 온돌 난방을 하고, 식생활에 필요한 화롯불을 만든다. 화롯불을 이용해 밥을 짓고, 국을 끓이고 여름에는 국이 변하지 않도록 항상 화로에 냄비가 올려져 있다. 또한 화로의 중요한 기능은 난로 역할이다. 아궁이에 장작을 충분히 지피지만, 그래도 봄가을 특히 겨울의 웃풍은 춥다. 안방의 화로 하나가 웃풍을 막아 주는 난방으로 충분한 기능을 한다.
 노인의 소통로는 길이다. 외부와의 소통을 위해 노인의 또 다른 일은 길을 정비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많이 살 때는 잘 닦아져 있던 산길은 점점 좁아지고 희미해져 간다. 산 위에 굴피집이 있고 그곳에 사람이 살고 있다는 유일한 표식인 길은 우리의 관심에서 멀어지듯이 세월 속으로 사라지고 있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방안에 겨둔 등잔불이 점점 희미해져 감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라볼 뿐이다. 오늘도 동짓달 기나긴 밤을 소주 한잔으로 잠을 청한다. 내일 아침 새소리로 다시 깨어날 것을 기약하면서.
 이렇듯 선종불교가 풍미했던 신라말 고려초 승려들이 입적하면 현재와 같이 다비를 하지 않고 매장을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스님이 입적을 하면 1차로 가매장을 하였다가 뼈만 남게 되면 이를 수습하여 다시 장례를 지내는 2차장이 일반적이었다.
 우리가 과거를 안다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더구나 역사는 종결된 과거의 사실을 재구성하는 학문이다. 역사는 종결된 과거에 있었던 사실이기 때문에 과거는 스스로 말하지 않는다. 이는 역사가는 끊임없이 사료(史料)라는 과거의 흔적을 찾아 이를 해석하고 재해석하면서 궁구하는 것이라 믿는다.
 필자는 역사를 공부하면서 다음과 같이 다짐하며 산다. ‘아무것도 믿지 마라. 읽고 본 것도 믿지 말고 모든 것을 의심하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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