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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양강 처녀상이 있는 강가에서 봉의산 쪽을 바라보면 산기슭에 날렵한 정자 하나가 보인다. 소양정(昭陽亭)이다. 1984년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1호로 지정된 이 정자는 춘천 문화의 상징으로 꼽힌다. 삼국시대에 건립되었다고는 하지만 사실은 건립 연대를 추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조선 말기에 소양정의 역사를 간략하게 기록한 이유원(李裕元: 1814~1888)의 글이 요령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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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소양정은 소양강 가 바위 위에 건립되어 있었다. 이곳은 물이 감돌아 흐르는 곳에 위치해있어서, 홍수가 크게 지면 떠내려간 기록이 몇 차례 있다. 이유원의 기록에도 두 차례나 떠내려간 사실을 적시하였다. 이후 6.25 전쟁 때 소실된 것을 1966년 원래의 정자 터로 도로가 나면서 지금의 위치, 즉 봉의산 산록(山麓)으로 옮겨서 재건하였다. 소양정의 원래 이름은 이요루(二樂樓)였다. 강가에 있으니 물을 감상하기에 좋고, 뒤를 바라보면 아름다운 봉의산이 있으니 산을 감상하기에도 좋다.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하고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한다.[仁者樂山, 知者樂水.]“라고 했다.「논어」를 비롯하여 여러 문헌에 나오는 공자의 이 말은, 조선 시대 선비들에게는 얼마나 지침이 되었겠는가. 이 말씀을 본받아 산과 물을 감상하는 것으로 마음을 수양했다. 정자가 비록 유람하는 곳이지만 따지고 보면 유람 자체도 마음을 수양하는 도구로 쓸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공자의 저 말씀에 ‘요산(樂山)’과 ‘요수(樂水)’가 있으니 ‘이요루(二樂樓)’라고 불렀을 것이다. 소양정의 위치를 감안하면 이보다 더 적합한 이름이 있을까 싶기도 하다. 그러다가 나중에 정자 앞을 흘러가는 소양강의 이름을 따서 소양정이라고 명명했을 것이다. 깊은 산에서 시작하여 큰 바다에 이르기까지 강은 흐르기를 멈추지 않는다. 흐르기를 멈추었을 때 그것은 이미 강이 아니다. 흐르는 강물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삶의 영원함을 읽거나 진리의 항상성을 발견한 것은 이에서 연유한다. 인생백년이라고들 하지만 살다 보면 참으로 짧은 세월 아닌가. 그러나 강물의 흐름은 언제나 한결같았고, 인간은 자신의 유한함을 돋을새김하는 자료로 강물을 주목하지 않았을까. 강가 언덕 위에서 공자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설파한 바 있다. “흐르는 것이 이와 같도다. 밤낮으로 쉬지 않는구나![逝者如斯夫, 不舍晝夜!]” 공자에게 있어서 강물은 끊임없이 노력하는 상징물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전통을 이어서 조선의 유자들 역시 강물의 영원성을 노래하였다. 널리 알려진 바 있는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 중의 일절, “청산(靑山)은 어찌하여 만고(萬古)에 푸르르며, 유수(流水)는 어찌하여 주야(晝夜)에 그치지 아니하는고, 우리도 그치지 말아 만고상청(萬古常靑)하리라” 하는 경계는 바로 공자의 이러한 자세를 이은 것이다. 만고상청(萬古常靑)의 경계라니! 그것은 성삼문이 죽음 앞에서도 꼿꼿할 수 있었던 겨울철 푸른 소나무의 독야청청(獨也靑靑)과는 또 다른 깊이를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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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졸 시작한 냇물은 하나씩 모여 점점 큰 강줄기를 이룬다. 때로는 거대한 흐름을 만들기도 하고 때로는 소용돌이치면서 감돌기도 한다. 큰 바다로 가는 길이 어찌 쉽기만 할 것인가. 앞서 언급한 것처럼, 춘천에 있는 소양정은 산과 강이 만나는 경계선에 위치한다. 소양정은 강 건너 우두벌을 바라보는 봉의산록에 있다. 춘천 지역 인근에서는 가장 유명한 정자였던 소양정은 영서 지역을 대표하는 명소였으니, 예로부터 시인 묵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들은 소양정에 올라 멋진 풍광을 만나면 문득 시 한 수를 남기곤 했다. 명소가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곳이 되는 이유는 거기에 뛰어난 문학 작품과 이야기가 스며있기 때문이다. 소양강 역시 역사 속에 많은 이야기를 품으면서 세월을 견뎌왔다. 소양강을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널리 알린 인물은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일 것이다. 조선 초기 한동안 경운산(慶雲山)* 청평사(淸平寺)에 머물던 당시 지은 것으로 보이는 시가 전한다. 3수 중에서 제1수와 제2수를 읽어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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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김시습의 행적에서 흔히 방랑과 비판의 정신을 읽곤 한다. 김시습은 어떤 인물인가. 보잘것없는 가문에서 태어난 그는, 자신의 뛰어난 재주를 바탕으로 뭇 사람들의 눈길을 한몸에 받으면서 자라난다. 사람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던 그의 삶이 예기치 않던 사건으로 삐끗하게 된 것은 바로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 사건이었다. 김시습은 당시 삼각산에 있는 절에서 글을 읽고 있었다 한다. 쿠데타 소식을 접한 김시습은 삼 일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고 바깥출입도 하지 않은 채 깊은 침묵에 빠졌다고 한다. 그리고는 그 길로 길고 긴 방랑을 시작한다. 위에서 소개한 시는 김시습의 「관동일록(關東日錄)」 안에 수록되어 있다. 정확히 언제 지은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작품 배열이 여행지 순서로 되어 있는 것으로 미루어 아마도 그가 37세에서 48세까지 약 10년간의 성동은거기(城東隱居期)를 마치고 다시 관동으로 방랑을 떠났을 때의 것으로 추정된다. 일반적으로 정자에서 노닐면서 지은 시들이 주위의 풍광이나 자신의 흥겨운 회포를 노래하는 반면 김시습의 이 시는 자신의 고민과 갈등을 소양정 주변의 경관과 관련하여 잘 형상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작품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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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양정에 올라서 근심과 한스러움으로 가득 찬 자신의 삶을 돌이켜 보는 것으로 시작한다. 지금도 소양정에 올라보면 무심한 얼굴로 이리저리 휘어져 누워있는 소양강을 볼 수 있다. 강은 멀리 작은 산들과 하늘 사이로 사라진다. 지금의 자리보다 훨씬 강가였을 김시습의 시선은 한결 강과 가까웠을 것이고, 넓은 하늘이 더욱 넓어 보였을 것이다. 드넓은 하늘이 끝나가도 자신의 시름은 끝나지 않으리라는 투의 말로 시를 시작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평생 방랑과 근심으로 점철된 세월. 그것은 세상과의 인연을 포기하고 잊지 못하는 것에서 비롯된다. 첫째 연 7~8구(尾聯)에서 세상 그물을 포기하고 싶은 심정을 토로한 것에서 세상에의 머뭇거림을 읽을 수 있다. 김시습의 시는 자신이 서 있는 소양정의 평온함과 소양정 저편 험난한 세상의 이원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자신은 이곳의 평온함을 즐기며 살고 싶고 또한 그 즐거움을 세상으로 확대하고 싶지만,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둘째 수 5구(句)에 승냥이 이리 등으로 표현된 것처럼, 자신의 이상 실현을 막고 있는 부당한 세력 때문이다. 표면적으로 보면 이 표현은 춘천이 워낙 산골짜기라서 대낮에도 이리나 승냥이가 길을 횡행한다는 의미이지만, 실제로 그것이 지칭하는 바는 부당한 힘으로 정권을 농단하면서 백성들의 삶을 힘들게 하는 권신(權臣)들이다. ‘豺狼當路(시랑당로)’는 간악한 대신이 요로를 점거하고 권세를 떨친다는 의미로 쓰이는 상투어이다. 그것은 땅거미 질 무렵의 시간적 배경과 어울려 쓸쓸한 느낌을 던져 주지만, 곧이어 등장하는 구절 ‘가슴을 열고 북풍을 맞겠다’라는 것에서 김시습의 굳건한 의지와 세상에 대한 의연한 자세를 볼 수 있다. 예전 자신과 함께 공부하던 사람들은 권력의 길로 들어서서 고위층에 있지만, 자신은 결코 뜻을 꺾을 수 없어 방외(方外)에서 노닐었던 김시습. 평생토록 권세와 무명, 부와 궁핍, 안일과 고달픔, 안주와 떠돎의 경계선에서 갈등하고 번민하면서 끝내 자신의 치열한 비판의식을 잃지 않았던 사람. 그는 소양정에 올라서도 여전히 경계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과 강의 경계, 의연함과 유유함의 경계에 서 있는 소양정 한 구석에서 세찬 북풍을 온 가슴으로 맞으면서 역사와 험난한 현실 앞에 당당했던 사람이었다. * 지금은 五峯山으로 부르지만 이 산의 원래 이름은 경운산 혹은 淸平山이었다. 오봉산이라는 명칭은 근래에 생긴 것으로 보이는데, 그 유래를 도대체 짐작할 수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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