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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흡(金昌翕: 1653∼1722)은 좌의정 김상헌(金尙憲: 1570~1652)의 증손이며 영의정 김수항(金壽恒: 1629~1689)의 셋째 아들이다. 또한 영의정 김창집(金昌集: 1648~1722), 예조판서 지돈녕부사 김창협(金昌協: 1651~1708)의 동생이기도 하다. 형 김창협과 함께 성리학과 문장으로 널리 이름을 떨쳤다. 1673년에 진사가 되었고, 1684년 장악원주부에 임명되었으나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1689년에 기사환국으로 아버지가 진도에서 사사되자 영평에 은거하였다. 『장자』와 사마천의 『사기』를 좋아하고 시에 힘썼으며, 친상을 당한 뒤에는 불경을 탐독하여 슬픔을 잊으려 하였다. 그 뒤 주자의 글을 읽고 깨달은 바가 있어 유학에 전념하였다. 그는 여기저기서 은거하였는데 대표적인 은거지 중의 하나가 삼부연폭포 위에 있는 마을인 용화동이다. 행정구역상으로 신철원3리이다. 김창흡은 용화동 근처의 석천계곡을 유람하고 「석천곡기(石泉谷記)」를 남겼다. 철원과 관련된 대표적인 기문이다. 『삼연집(三淵集)』의 해제에 의하면 김창흡은 숙종 6년인 1680년 3월에 석천사를 유람하였다. 동생인 김창즙(金昌緝: 1662~1713)의 연보에도 이 해에 석천사를 유람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김창흡은 동생과 유람하기 한 해 전인 1679년, 곧 용화촌에 복거하기 시작한 해에 처음 석천계곡을 답사하고, 이듬해에 두 번째 유람한 후 「석천곡기」를 지은 것으로 보인다. 20대 후반의 형과 10대 후반의 동생이 석천계곡을 유람하였고, 이틀 뒤 김창흡은 홀로 다시 계곡을 샅샅이 유람한 후 글을 남기게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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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름 밑으로 하얗게 보이는 계곡 입구가 궁금했다. 처음엔 산사태가 난 곳인 줄 알았다. 계곡으로 들어와서도 하늘이 보이는 곳마다 이곳을 볼 수 있었다. 점점 가까워지자 그곳이 바위란 것을 알았고, 바로 앞에 와서야 구첩병임을 알았다. 구첩병은 목이 아파서 제대로 볼 수 없을 정도다. 누워야만 온전히 구첩병을 감상할 수 있다. 바로 앞의 미화석은 코로 감상해야 하는 곳이라면, 구첩병은 계곡의 바위에 누워 감상해야 하는 곳이다.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까마득히 솟은 바위벽은 두려움마저 들게 할 정도다. 틈이라곤 없을 것 같은 바위에 뿌리를 내리고 사는 나무들을, 김창흡은 공중에 있는 것 같다고 묘사했다. 밋밋할 것 같은 거대한 바위는 나무로 인해 살아있는 바위가 되었고, 생기 있는 바위는 백 폭 병풍이 되어 석천계곡의 바람막이가 되었다. 구첩병 아래로 깊은 못이 휘감아 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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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운폭포는 직각으로 떨어지는 폭포가 아니다. 위는 직폭(直瀑)이고, 아래는 와폭(臥瀑)이다. 규모는 삼부연폭포와 맞먹을 정도이다. 물줄기 주변은 흠뻑 젖어있다. 바람이 불지 않아서 흰 구름이 엉킨 것과 같은 황홀한 모습을 볼 수 없지만, 하얀 천처럼 펼쳐진 물보라는 답사객의 고단한 몸을 잊게 해준다. 폭포의 규모가 크기 때문에 카메라 앵글에 모두 담기 어려울 정도다. 김창흡은 위에서 내려다본 폭포가 기이하다고 했다. 과연 내려다보는 폭포는 짜릿하다. 떨어지는 물줄기와 함께 떨어지는 듯한 느낌이 들어 자꾸 뒷걸음질 치게 만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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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곡 상류까지 유람하고 내려오다가 석천사에 들렸다. 석천사는 석천암으로 불리기도 했다. 고려 시대에 인근 용화사의 승려가 창건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조선 시대에 이르기까지 유명한 수도처의 하나로서 많은 수도승이 거처했다. 영험한 약수가 있어서 요양객들도 즐겨 찾았으나, 조선 후기에 폐사가 되었다. 절터에 대한 정보는 소운폭포 위쪽이라는 것과, 절을 왼쪽으로 두고 하수렴으로 향했다는 기록이 전부다. 절을 왼쪽으로 두었다는 것은 계곡 상류를 보고 섰을 경우 왼편이기 때문에 계곡과 왼쪽 산 사이의 공간에 절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 하나는 바위에서 흘러나오는 샘물이 있다는 것이다. 절터를 찾아 나섰다. 수풀을 한참 뒤지자 건물이 있었을 법한 평평한 터가 몇 군데 보이고, 석축의 흔적도 나무 사이로 보인다. 와편은 여기저기에 흩어져있다. 저쪽에서 샘물을 찾았다는 환호성이 들린다. 풍부한 수량은 아니지만, 바위틈에서 졸졸 흘러내린다. 아래는 낙엽이 수북이 쌓여 있고, 샘터 주변에 제구가 놓여있다. 나뭇잎으로 잔을 만들었다. 시원함이 뱃속까지 전해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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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적총람』은 폐사와 관련된 전설을 전해준다. 절의 바위틈에서 매일 일 인분의 쌀이 나왔다. 어느 날 욕심 많은 수도승이 쌀을 많이 얻으려고 바위틈을 크게 뚫었으나, 쌀은 나오지 않고 샘이 터지면서 뱀이 나왔다. 그 뒤 샘물이 흐려지게 됨에 따라 승려들이 떠났고, 절은 폐사가 되었다고 한다. 전설은 무엇을 이야기하는 것일까? 인간의 탐욕을 경계하는 것이 아닐까? 폐사지는 답사객에게 욕심을 경계하라고 일깨워준다. 석천사의 샘물은 근처 주민들 사이에 유명했던 것 같다. 영험하다고 소문난 샘물은 제대(帝臺)라는 신인(神人)의 물에 비유된다. 샘물을 마시면 신선이 될 수 있다고 샘물을 칭송한다. 신선이 되지 못하더라도 정신이 번쩍 들 정도로 시원하다. 김창흡은 석천사에서 집으로 돌아오다가 구첩병 위에서 시를 남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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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봄날이 저만치 가는 중이다. 꽃은 아직 주위에 남아 있다. 봄날을 잠시나마 붙잡고 싶어서 꽃을 손에 든다. 어떤 심정이겠는가? 봄날을 보내는 짙은 아쉬움이 시에 배어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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