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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광연(宋光淵: 1638~1695)은 1654년(효종 5)에 벼슬길을 시작한다. 부침이 심한 벼슬살이를 하다가 경기도 고양에 정자를 짓고 낙향하게 된다. 다시 환로에 나가 예조참의 · 황해도 관찰사를 지내다가 권신의 탄압으로 춘천부사로 좌천되면서 춘천과 인연을 맺게 된다. 후대 사람들은 성품이 강개하고 벼슬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오로지 학문만 했다고 입을 모은다. 송광연이 남긴 『범허정집(泛虛亭集)』은 한시를 포함해서 다양한 작품들을 싣고 있는데, 춘천부사로 있을 때 춘천 삼한동을 유람하고 「삼한동기(三韓洞記)」를 남겼다. 춘천과 관련된 발자취는 문집 여기저기에 숨어 있다. 행정관료로서의 모습은 세 편의 기우제에서 볼 수 있다. 사직과 대룡산, 그리고 신연강을 향하여 백성들에게 고통을 주는 가뭄을 빨리 끝내달라고 호소하였다. 한시로는 「청평산에 들어가며」와 봉황대에 올라가서 지은 「봉황대에 올라 이태백 시를 따라 짓다」가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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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곡이 시작되는 곳에서부터 십여 리를 갔다고 하나, 지금의 정확한 거리 계산과는 차이가 있을 것이다. 아마 너무 힘들어서 그만큼의 거리로 착각한 것은 아닐까. 송광연은 삼한동과 삼한사의 유래를 사람들의 전언을 통해 설명한다. 『춘주지』에 수록된 삼회사(三檜寺)에 대한 설명과 일치한다. 『춘주지』는 삼회사에 대해 “경운산의 서쪽에 있다. 세상에 전하기를, 이 절은 소양정과 함께 모두 삼한 시대에 세워졌다. 천 년 된 옛집이 조금도 기울거나 틈이 생긴 곳이 없다. 섬돌은 잡석으로 어지러이 쌓았는데 조금도 미세한 틈으로 물이 샐 곳이 없으니, 보는 자가 기이하게 여겼다. 을해년에 화전으로 개간하여 모두 타 없어졌다.”라고 말한다. 송광연이 언급한 삼한사와 읍지가 말하는 삼회사는 같은 곳으로 보인다. 삼한동의 유래에 대해서 친절하게 설명하지 않았으나 삼한사가 있어서 계곡의 이름이 생겼음을 넌지시 말해준다. 반대일 수도 있다. 발산리 사람들은 ‘삼한골’이라 부른다. 삼한골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는 다리 이름은 ‘삼한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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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부대 안이라 생기는 묘한 긴장감과 삼한동을 걷는다는 설렘이 뒤섞인 채 걸었다.(지금은 군부대가 철수하고 춘천숲체원이 들어섰다.) 바위로 이루어진 계곡은 일반인들의 출입이 금지되어서인지 티끌도 없을 만큼 깨끗했다. 얼마쯤 가자 폭포가 나타난다. 구층대는 폭포 위에 있는 바위를 말한다. 바위를 차곡차곡 쌓은 듯한 모습이 늠름하다. 마을 사람들은 신선바위라고 부른다. 송광연은 구층대 밑에 있는 폭포를 청평산 구송정 옆 폭포와 비유했는데, 규모는 비슷해 보인다. 폭포 밑은 억겁의 세월 동안 물세례를 받아서 깊게 파인 연못이다. 손으로 떠 마시고 세수를 한 후, 한참 동안 앉아서 땀을 식혔다. 송광연은 이곳에 앉아서 조금이나마 마음의 시름을 씻었을까? 시를 남길 법도 하지만 문집을 몇 번 찾아봐도 삼한동과 관련된 시는 보이질 않는다. 주변은 온통 신록이다. 춘천은 이미 꽃이 떨어지고 있으나, 깊은 산골인 이곳은 이제야 기지개를 켜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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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포를 지나 상류로 갔다. 먼저 눈에 보이는 것은 축대다. 송광연이 이곳을 방문했을 당시에 터만 있었으며, 이후로도 계속 방치되었던 것 같다. 축대가 온전할 리 없다. 더군다나 나무를 실어 나르기 위한 도로가 절터 가운데를 통과하면서 심하게 파괴되었다. 도로 흔적은 많이 사라지고 원상태로 복구되는 중이지만, 한번 훼손된 절터는 축대만이 아슬아슬하게 남이 있을 뿐이다. 주민들은 이 절터를 ‘불탄 절터’라 부른다. 절에 빈대가 많아 불을 놓고 절을 떠났다고 하는데, 전국에 퍼져 있는 폐사된 절의 설화와 흡사하다. 절터에선 기와 조각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가끔 백자 파편도 보인다. 기와와 도자기 파편은 최소한 조선 중기 이전에 구워진 것이다. 말랑말랑한 다래가 여기저기에 떨어져 있다. 식암(息庵)은 이자현(李資玄: 1061~1125)이 거처하던 곳이다. 직접 가보지 못하고 주변 사람들의 말을 전하면서 아쉬움을 내비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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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봉우리와 계곡이 품고 있는 폭포들로 어우러진 삼한동은 청평산 서천 계곡에 필적할 만하다. 규모로만 본다면 더 크다고도 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평산의 계곡에 비하여 알려지지 않음을 송광연은 안타까워하고 있다. 그러면서 자신의 답사기로 인하여 삼한동이 후대에 알려지기를 은근히 기대하고 있다. 계곡은 온통 너럭바위들이며 곳곳의 바위들은 오랜 시간 동안 물에 씻겨 매끄럽거나 둥글게 파였다. 계곡 옆은 울창한 숲이다. 눈에 보이는 것은 물과 바위와 숲이며, 들리는 것은 물소리와 새소리, 그리고 이따금 지나가는 바람 소리다.
율곡은 34세에 강릉시 연곡면에 있는 지금의 소금강 산길을 걷고 「유청학산기(遊靑鶴山記)」를 남겼다. 송광연은 바로 이 사실을 언급한 것이다. 청학산은 마치 금강산을 축소해 놓은 듯 절경이라 하여 소금강이라 불리게 된다. 율곡의 답사기 중 마지막 부분은 이러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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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학산이 율곡을 만나서 비로소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처럼, 자신을 율곡에 비유하면서 삼한동 유람을 마친다. 송광연의 글로 세상에 알려지게 된 삼한동. 지금은 군부대를 거쳐 숲체험원이 들어섰다. 다시 삼한동의 운명은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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