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학자가 사랑한 수종사

정성희(학예연구사)



올해 박지원·박제가 서거 210년을 맞아 실학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는 5월 29일부터 9월 30일까지 “북학파의 꿈” 특별전을 개최하고 있다. 이번 전시는 조선후기 백성들의 생활현실을 개선하기 위해 낡은 제도를 개혁하고 보다 나은 사회로 발전시키고자 했던 북학파들을 조망해 보는 자리로 마련되었다.

18세기 한양은 인구가 늘고, 상공업이 조금씩 활발해져서 상품화폐 경제가 발달해 가는 도시였다. 이렇게 변화가 요구되는 현실 속에서 청나라의 발전된 모습과 중국에 들어 온 서양 문물을 적극 배우고 받아들여 조선의 개혁과 발전을 꿈꾸었던 실학자들이 북학파이다. 이들은 이용(利用)과 후생(厚生)을 주장한 중상주의적 실학파로서 연암 박지원을 중심으로 탑동 일대에 모여 지냈기에 백탑파라고도 불렸다.

특히 북학파를 대표하는 실학자인 연암 박지원과 초정 박제가는 이용후생이라는 측면에서 청조의 정신과 개혁정책안을 제시한 실학자들이었다. 상업과 유통, 과학기술의 혁신, 북학의 수용 등을 통해 낡고 낡은 조선사회를 바꾸고자 한 것이다.

박지원과 박제가가 세상을 떠난지 210년, 새로운 문명을 추구해 나가야 하는 우리에게 이들의 고뇌에 찬 역정을 살펴보는 이번 전시는 역사적 동력과 경험이 될 것이다.

5개 주제로 구성된 전시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 18세기 한양과 도시 발달

 

18세기 조선사회는 상업과 수공업의 새로운 변화가 있었다. 수도 한양을 중심으로 도시가 발전하였고, 이는 당시 지식인에게 자극을 주어 이른바 ‘이용후생학’의 성립을 보았다. 북학파, 이용후생파, 연암학파, 백탑파로 불리는 이들 실학지식인들이 가진 사회개혁은 그들이 사는 공간이기도 한 도시서민층과 연결되어 있었다. 북학파 실학자들은 유통 위주의 경제론을 폈고, 이는 당시 소상품생산자들의 「시장」확대의 욕구를 대변한 것이었다.

 
 
 
 
 

2. 백탑시사의 결성

 

1767년을 기점으로 박제가를 비롯하여 이덕무, 유득공 등 서자 출신의 문인이 주동이 되어 ‘백탑시사’라는 문학동인 모임이 결성되었다. 백탑은 북학파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서울 원각사 절터(현 파고다 공원)에 10층 석탑이 있었는데, 당시 이것을 ‘백탑’이라 불렀다.

백탑시사 문인들은 백탑 주변에 거주했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박제가와 함께 백탑시사를 이끌었던 유득공·이덕무가 대사동(현 인사동)에 살았고, 박제가는 남산 밑 청교동(현 을지로 5가)에 살았다. 1768년에는 연암 박지원이 백탑 부근으로 이사를 왔다. 백탑시사의 좌장격인 박지원의 집으로 홍대용, 정철조, 이덕무, 백동수, 이서구, 서상수, 유금, 유득공, 박제가 등이 찾아오면서 자연스레 백탑파가 결성된 것이다.

조선 최고의 시짓기 모임이었던 백탑파 문인들의 시는 멀리 중국까지 알려졌다. 백탑시파 문인이자 유득공의 숙부였던 유금이 1776년 중국사절단으로 중국에 가면서 박제가, 이덕무, 유득공, 이서구의 시 399편을 모은 「한객건연집(韓客巾衍集)」이라는 책을 북경에서 펴냈다. 중국 최고의 지식인 이조원과 반정균이 이들의 시를 높이 평가했고, 이들 네 사람은 북경의 시단에서 시인으로 명성을 날렸다.

 
 
3. 북학의 꿈을 꾸다
 

백탑시사 문인들이 중국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담헌 홍대용의 영향이 컸다. 이들은 홍대용의 중국여행기를 접하면서 서서히 중국 문명에 대해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조선후기 3대 연행록이라 일컬은 김창업의 「노가재연행일기(老稼齋燕行日記)」와 홍대용의 「을병연행록」, 박지원의 「열하일기(熱河日記)」는 조선 지식인들이 중국 문명에 호기심을 가지게 만들어 주었고, 특히 백탑시파에 영향을 준 것이 홍대용의 연행록이었다. 그들은 연행을 통해 청나라의 발전된 학문과 문물을 수용하여 이용후생(利用厚生)의 도구로 삼자는 “북학(北學)”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 홍대용과 엄성의 시공을 초월한 우정
 
 
 
 
 

4. 이용후생의 경제론

 
북학파의 북학이라는 말은 박제가의 저술인 「북학의(北學議)」에서 비롯된 것이다. 박제가는 청조문명의 선진성을 인정하고 배우자는 뜻으로 북학을 주장했다.

박제가가 「북학의」의 서문에서 주장한 '학어중국(學於中國)’의 실체는 청의 문명을 받아들이고 서구문명에 대한 새로운 인식 속에서 상공업의 유통과 생산기구, 기술의 발전을 바탕으로 사회모순을 개혁하고 국가발전을 도모하려는 데 있었다.

북학은 변화된 국제질서와 조선사회 내부의 변화와 발전에 부응하여 이를 더욱 가속화시키며, 민생을 획기적으로 개선하여 이롭게 하는 이용후생(利用厚生)의 실용적 학풍을 선도하였던 결과였다.

 
 
 
 

▪ 이용후생의 학문을 담은 사회경제서 「열하일기」

 
“청나라에서 가장 볼만한 장관이 광활한 영토나 아름다운 산수 혹은 화려한 누각이나 거대한 성곽이 아니라 깨어진 기와조각과 똥 부스러기이다”

“이용(利用)이 있은 다음에야 후생(厚生)이 될 것이요, 후생이 된 다음에야 올바른 다스림이 있을 것이다. 대체로 이용이 되지 않으면서 후생 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무니, 생활이 이미 제각기 넉넉하지 못하다면 어찌 그 마음을 바로 지닐 수 있겠는가.”

- 박지원, <열하일기> ‘도강록’ 중에서


▪ 가난에서 벗어나는 길은 통상무역이다 『북학의』
 
박제가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북학의(北學議)』는 채제공의 도움으로 첫 연행길에 오를 수 있었던 1778년(정조) 9월 29일에 완성되었다. 『북학의』의 ‘북학’이란 중국을 선진 문명국으로 인정하고 겸손하게 배운다는 뜻을 담고 있다. 박제가는 조선이 가난한 것은 무역이 부진한 탓이라 여겼고, 그렇게 된 원인은 우물물을 긷지 못한 것처럼 부의 원천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누구나 중시했던 검소와 절약 관념을 정면으로 비판한 것이다.”

 
 
▪ 삶의 경제론 『임원경제지』
 
18세기 이용후생학을 계승한 서유구는 “조선의 농업과 공업이 낙후된 것은 한마디로 사대부의 잘못”이라고 지적한다. 홍만선의 「산림경제山林經濟」에 이어 개인의 삶과 복리에 관심을 둔 서유구는 장편의 「임원경제지」를 저술하여 농업과 임업, 의식주를 포함한 일상문화를 집대성하였다.

5. 북학의 계승과 발전

 
북학파들의 경제사상은 19세기 개국통상으로 이어진다. 박지원의 친손자이기도 한 박규수는 일찍부터 통상개화(通商開化)를 통한 조선의 부국강병에 큰 뜻을 두었다. 특히 조선이 스스로의 힘으로 개국할 것을 거듭 주장하다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관직에서 물러난 후 김옥균·홍영식·서광범 등 젊은 개화사상가들을 모아 친히 가르쳤다. 당시 박규수는 ‘박지원의 <연암집>’을 강의하면서 서양의 과학기술과 통상개화 및 부국강병의 뜻을 가르쳤다고 전한다.

박지원의 사회경제사상은 이렇듯 자신의 친손자인 박규수의 손을 거쳐서 김옥균, 홍영식 등 개화파 사상가들에 이르러 조선의 국운(國運)을 좌지우지한 거대 사상으로 재탄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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