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대용과 엄성의 천애지기

글. 정성희(학예연구사)

 
지난 8월 17일부터 8월 26일까지 9박 10일간 ‘신연암로드’ 라는 이름으로 올해 서세 210년을 맞는 실학자 연암 박지원(1738~1805)의 ≪열하일기≫ 노정을 답사하고 돌아왔다. 이 답사는 ‘창발적 문예 사건’을 일으킨다는 의도로 기획된 것으로 경기문화재단 문화 원형 콘텐츠 발굴 프로젝트 중 하나로 진행되었다. 현대무용가 안은미, 한국변검 창시자 김동영, 커뮤니티 아티스트 김월식, 시인 박설희 등 문화예술인들과 인문학자, 언론인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 총 19명이 참여했다.
신연암로드 추진단은 8월 17일 인천공항에서 중국으로 출발해 단동, 심양, 열하(승덕), 북경 등 열하일기에 등장하는 주요 장소들을 탐방하면서, 18세기 연암이 가졌던 고민과 사색, 그가 보았던 중국 문명 등을 주제로 토론하며, 새로운 문화예술 교류의 장을 만들어가는 노정을 함께 했다.
 
 
호산장성에서 내려다본 압록강 상류 유역(삼강)의 모습이다. 연암은 1780년 음력 6월 24일에 압록강을 건넜고, 이보다 앞서 담헌 홍대용은 1765년 겨울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며 ‘산해관 잠긴 문을 한손으로 밀치도다’라는 시를 읊었다.
≪열하일기≫는 압록강을 건너는 장면부터 시작한다. 연암은 천하의 세 강이 있으니 황하와 장강, 압록강이라 했다. 다산 정약용의 ≪아방강역고(我邦疆域考)≫에 따르면, 고조선과 연(燕)이 압록강을 경계로 있었다고 한다.
 
 
압록강 단교의 모습이다. 신의주와 단동을 잇는 다리로 물자 운송을 위해 일제가 건설하였고, 한국전쟁 때 중공군 진입을 막으려는 미군에 의해 파괴되었다. 현재 중국쪽에 절반만 남아 있는 끊어진 다리와 새로 복원된 다리가 있다. 복원된 다리로 중국과 북한을 잇는 버스가 지나다닌다.
 
 
만리장성이 시작되는 산해관(山海關) 관문 중 하나인 ‘천하제일관’과 발해까지 이어진 만리장성 ‘노령두’에서 바라본 해신묘의 모습이다.
산해관을 지날 때 조선사신들은 명나라 장수 오삼계(吳三桂)를 떠올리곤 했다. 난공불락의 요새였던 산해관 안으로 청나라 군사를 이끈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이자성의 반란으로 다급해진 명나라의 황제 숭정은 영원성에서 청나라 군대와 대치하고 있던 오삼계를 불러들였지만, 오삼계가 도착했을 무렵 숭정제는 이미 자살한 뒤였다. 황제가 죽자 오삼계는 이자성이냐, 청나라냐 선택의 기로에 있었는데, 그때 마침 이자성의 부하가 자신의 애첩인 진원원을 겁탈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격분한 오삼계는 산해관 문을 열고 청나라 군대를 불러들였다. 훗날 이자성은 한족의 부활을 위해 삼번의 난을 일으키지만, 실패하고 만다. 과연 명나라는 오삼계 때문에 망했을까? 그가 아니더라도 명나라는 꺼져가는 불꽃이었다.
 

1761년 조선 사신단이 그린 산해관 외성의 모습이다(심양관도첩 중에서)

 
우리 일행은 심양을 거쳐 장시간 버스를 타고 열하에 도착하였다. 열하는 청나라 황제의 피서산장이 있었던 지역답게 푹푹 찌던 다른 곳과는 달리 선선했다. 열하의 피서산장은 강희제 때 만들기 시작하여 건륭제에 완성되었다. 건륭제는 피서산장에서 1년 중 6개월을 살았다. 열하를 간 실학자는 1780년 건륭의 칠순잔치에 간 박지원이 있고, 10년 뒤인 1790년 건륭의 팔순잔치를 맞아 박제가와 유득공이 열하 땅을 밟았다.
 
 
중국 내의 소수 민족과 각국의 사신들을 초대해 연희를 베풀었던 청나라 황제의 여름 별장 ‘피서산장’의 모습이다.
 

열하의 문묘 부속 건물인 태학(중세의 국립대학 격임)에서의 추진단 모습. 건륭제는 조선사신단이 태학에서 묵도록 했는데, 여기서 연암은 곡정 왕민호와 함께 지구자전설 등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이 대화는 ≪열하일기≫의 「곡정필담」에 전한다.

 

≪열하일기≫의 「곡정필담」(실학박물관 소장)

 
단동을 시작으로 요양, 심양, 열하(승덕)를 지나 ‘신연암로드 추진단’은 8월 23일 북경에 도착했다. 18세기와 19세기 북경은 한중문화교류 현장이었다. 북경 유리창거리에서 실학자들은 틈나는 대로 유리창의 서점가를 돌며 학문탐구열을 불태웠고, 중국의 지식인들과 만나 교유하였다. 유리창(琉璃倉)이란 말은 유리기와를 만드는 곳이란 뜻인데, 북경 유리창 거리는 명나라 때 수도를 북경으로 옮기기 위하여 궁을 건설하느라 다른 지방의 돌을 운반해서 유리기와를 만들면서 조성된 것이다. 청나라 때 ≪사고전서≫ 편찬으로 도서와 문방사우의 집산지가 되고 서화와 유물 가보 등 그 종류가 늘어나면서 일찍부터 우리나라 서울의 인사동 처럼 골동품의 거리가 되었다.
필자는 주어진 3시간의 자유시간을 이용하여 연암노정 전문가인 신춘호 선생, 박설희 시인과 함께 실학자들이 교류했던 문화 공간들을 숨가쁘게 답사하였다.
 
 
‘열미초당’의 모습이다. 열미초당은 북경에서 박제가와 교류했던 청나라 문인 기윤의 집이다. 기윤은 건륭제 때 ≪사고전서≫ 간행을 총괄한 인물이다. 건륭제 앞에서 담배를 피울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었다고 한다.
 
 
감정호동(간징후통), 담헌 홍대용의 ‘건정동 필담’에 나오는 건정호동이다. 중국학자인 엄성, 육비, 반정균등과 국제적인 우정의 만남을 가졌던 장소가 바로 유리창 건정동의 천승점 여관인데, 그들은 간징후통에서 일곱차례, 옥하관에서 한차례 만나 필담교류를 하였다. 현재 그들이 만났던 여관의 흔적은 없고, 그나마 남아있던 감정호동 동네 마저 2008년 북경올림픽 때 도시 미화계획에 따라 거의 사라졌다.
 
 
북경 유리창 근처 양매죽사가(楊梅竹斜街)에 있는 주택 모습이다. 열하에서 북경으로 돌아온 연암이 유리창에 위치한 양매서점 거리에서 중국의 학자 유세기를 만났다. 연암은 ≪열하일기≫에서 “나는 유세기를 유리창에서 처음 만났는데 그의 자는 식한(式韓)이며 거인(擧人)이다. 열하에서 북경으로 돌아온 뒤로 유세기와 약속하여 양매서점 거리에서 무려 일곱 차례나 만났다.”고 기록으로 남기었다. 연암의 작품 ‘양매시화(楊梅詩話)’도 이 거리 이름에서 따왔다.
 
 
북경 코리아센터에서 중국 최초로 열린 한국변검 창시자 김동영과 그의 스승인 경극 공연 예술가 주홍무의 ‘한중 변검 합동 공연’ 모습이다. 한중간의 문화예술콘텐츠 교류 및 확장의 가능성을 타진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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