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사람은 한 달 동안 일곱 번 만나고 평생 국경을 뛰어넘는 우정을 나눴다. 조선으로 돌아 온 홍대용은 이들과 나눈 왕복 편지와 필담을 묶어 ‘회우록(會友錄)’이라 하고 이 서문을 박지원에게 부탁했다. 훗날 병에 걸린 엄성이 홍대용이 선물해 준 묵향을 맡으며 숨을 거뒀다는 얘기나 엄성의 임종을 전해들은 홍대용이 보낸 제문이 엄성의 2주기 제삿날에 맞춰 도착했다는 얘기는 유명한 일화이다.
1783년 홍대용은 풍으로 쓰러진 후 일어나지 못했는데, 홍대용의 갑작스런 부고를 전달 받은 박지원은 그의 죽음을 슬퍼하면서 중국 문인 엄성과 시공을 초월한 우정을 묘지명에 담았다.

홍대용은 넓은 땅에서 제대로 된 선비를 만나고 싶은 소망이 있던 차에 북경 유리창에서 엄성·반정균·육비 등 청나라 학자들을 만났다. 이들 또한 평소 제대로 된 지기(知己)를 만나지 못하고 있었다. 이들은 서로의 학식에 놀라고 반기며 국경을 초월한 우정을 나누었다. ‘한 번 이별하면 다시는 못 만날 것이니, 황천에서 다시 만날 때 아무런 부끄러움이 없도록 살아 생전에 더욱 학문에 정진하자’하며 약속하고 영원한 이별을 하였다.
덕보(홍대용의 자)는 이들 중 동갑인 엄성과 특히 뜻이 잘 맞았다. 엄성에게 충고하기를 ‘군자가 자기를 드러내고 숨기는 것은 때에 따라야 한다’고 했는데, 엄성이 크게 깨우치는 바가 있어서 과거를 포기하고 남쪽으로 간 뒤 몇 해 만에 그만 죽었다. 부고를 받아든 덕보가 제문을 짓고 제향(祭香)을 중국으로 보냈는데, 마침 이것이 엄성의 집에 도착한 날이 대상(大祥;죽은 지 2년만에 지내는 제사)이었다. 모인 사람들이 모두 경탄하며 ‘명감(冥感)이 닿은 결과다’라고 하였다. 엄성의 아들이 부친의 유고를 덕보에게 보냈는데 돌고 돌아 9년 만에 도착하였다. 그 유고에는 엄성이 손수 붓으로 그린 덕보의 초상화가 있었다(그 초상화는 오늘날에도 전해지고 있으며, 홍대용의 유일한 초상화이다).
엄성이 병이 위독할 때 덕보가 보내준 조선산 먹과 향을 가슴에 품고 떠났다. 관 속에 이 먹을 넣어 장례를 치렀는데, 절강사람들이 기이한 일이라 하였다.
- 박지원의 「홍덕보묘지명」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