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대용과 엄성의 천애지기

글. 정성희(학예연구사)

 
  백탑시사 문인들이 중국 문명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중국 사행과 관련이 깊다. 백탑시사 문인들은 연암 박지원을 중심으로 연암그룹을 형성하였고, 이 연암그룹 중에서 가장 먼저 중국 땅을 밟은 이가 담헌 홍대용이였다. 조선후기 3대 연행록이라 일컬은 김창업의 《노가재연행일기(老稼齋燕行日記)》와 홍대용의 《을병연행록》, 박지원의 《열하일기(熱河日記)》는 조선 지식인들이 중국 신문명에 호기심을 가지게 만들었다.

조선 사행단이 북경 체류기간 동안 자주 들렀던 곳은 당대 문화의 중심지였다고 할 수 있는 유리창(琉璃廠)거리 일대였다. 유리창은 융복사와 더불어 시장이 발달하였는데, 18세기 건륭시기의 《사고전서》 편찬과 맞물려 더욱 번창하였고, 조선의 사신들과 지식인들은 반드시 들려야 하는 명소가 되었다. 홍대용은 유리창 인근의 건정호동(현 감정호동)에서 중국의 지식인 엄성, 육비, 반정균과 천애지기(天涯知己)의 우정을 나누어 당시 조선 지식인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홍대용과 엄성이 만났던 북경의 감정호동

홍대용은 1766년(영조 42) 조선 사신단의 수행원(자제군관)으로 중국 연경(베이징)을 찾았다가 과거시험을 보러 온 엄성(1732∼1767)을 만났다.
 
엄성의 초상화
 
두 사람은 한 달 동안 일곱 번 만나고 평생 국경을 뛰어넘는 우정을 나눴다. 조선으로 돌아 온 홍대용은 이들과 나눈 왕복 편지와 필담을 묶어 ‘회우록(會友錄)’이라 하고 이 서문을 박지원에게 부탁했다. 훗날 병에 걸린 엄성이 홍대용이 선물해 준 묵향을 맡으며 숨을 거뒀다는 얘기나 엄성의 임종을 전해들은 홍대용이 보낸 제문이 엄성의 2주기 제삿날에 맞춰 도착했다는 얘기는 유명한 일화이다.

1783년 홍대용은 풍으로 쓰러진 후 일어나지 못했는데, 홍대용의 갑작스런 부고를 전달 받은 박지원은 그의 죽음을 슬퍼하면서 중국 문인 엄성과 시공을 초월한 우정을 묘지명에 담았다.
 
엄성이 그린 홍대용의 초상화홍대용은 넓은 땅에서 제대로 된 선비를 만나고 싶은 소망이 있던 차에 북경 유리창에서 엄성·반정균·육비 등 청나라 학자들을 만났다. 이들 또한 평소 제대로 된 지기(知己)를 만나지 못하고 있었다. 이들은 서로의 학식에 놀라고 반기며 국경을 초월한 우정을 나누었다. ‘한 번 이별하면 다시는 못 만날 것이니, 황천에서 다시 만날 때 아무런 부끄러움이 없도록 살아 생전에 더욱 학문에 정진하자’하며 약속하고 영원한 이별을 하였다.
덕보(홍대용의 자)는 이들 중 동갑인 엄성과 특히 뜻이 잘 맞았다. 엄성에게 충고하기를 ‘군자가 자기를 드러내고 숨기는 것은 때에 따라야 한다’고 했는데, 엄성이 크게 깨우치는 바가 있어서 과거를 포기하고 남쪽으로 간 뒤 몇 해 만에 그만 죽었다. 부고를 받아든 덕보가 제문을 짓고 제향(祭香)을 중국으로 보냈는데, 마침 이것이 엄성의 집에 도착한 날이 대상(大祥;죽은 지 2년만에 지내는 제사)이었다. 모인 사람들이 모두 경탄하며 ‘명감(冥感)이 닿은 결과다’라고 하였다. 엄성의 아들이 부친의 유고를 덕보에게 보냈는데 돌고 돌아 9년 만에 도착하였다. 그 유고에는 엄성이 손수 붓으로 그린 덕보의 초상화가 있었다(그 초상화는 오늘날에도 전해지고 있으며, 홍대용의 유일한 초상화이다).
엄성이 병이 위독할 때 덕보가 보내준 조선산 먹과 향을 가슴에 품고 떠났다. 관 속에 이 먹을 넣어 장례를 치렀는데, 절강사람들이 기이한 일이라 하였다.
- 박지원의 「홍덕보묘지명」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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