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학자가 사랑한 수종사

 

글. 정성희 학예연구사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은 1737년(영조 13)에 태어나서 1805년(순조 5)에 69세를 일기로 타계한 조선후기 실학자이다. 본관은 반남(潘南)이며, 자는 미중(美仲) 또는 중미(仲美), 호는 연암(燕岩) 또는 연상(煙湘)·열상외사(洌上外史)이다. 그의 집안인 반남 박씨 가문은 영조 당시 노론측의 일원으로 명문거족이었다. 2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난 박지원은 지돈녕부사를 지낸 조부박필균에게서 글을 배우고 자랐다.그러나 정치적 부침으로 다소 가세가 기울어지자 아버지 박사유는 벼슬길을 멀리했다.

서울의 서쪽인 반송방 야동에서 출생한 박지원은 과거나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오직 학문과 저술에만 전념하였다. 1768년 백탑 근처로 이사하면서 박제가·이서구·서상수·유득공·유금 등과 학문적으로 깊은 교유를 가졌다. (백탑은 오늘날 서울 탑골 공원에 위치하며, 서울의 신지식인들이 모여서 활동하던 장소였다. 박지원, 박제가 등이 중심이 되어 중국 청나라로부터 선진 문물을 배워 조선의 상공업을 진흥하여 도시를 발전시키고 개국통상을 단행하자고 주장하였다.)

 
 

이 무렵 홍대용·이덕무·정철조 등과 자주 만나 토론했으며, 유득공·이덕무와는 관서 지방을 여행하기도 하였다. 당시 홍국영이 정권을 잡아 위세를 떨치자 벽파였던 박지원은 생명의 위협까지 느끼게 되었다. 1778년 결국 송도(개성)에서 삼십 리 쯤 떨어진 황해도 금천(金川)의 외진 골짜기 ‘연암’으로 은거했는데 그의 호가 연암으로 불려 진 것도 이에 연유한다. 1780년 홍국영이 실각하자 박지원은 정치적 은둔생활을 청산하고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서울로 돌아온 박지원은 청나라에 가는 기회를 맞았다. 8촌 형이자 영조의 사위인 박명원이 청나라 건륭제의 고희를 축하하기 위한 특별사행단의 정사로 임영된 것이다. 박지원은 박명원의 권유에 따라 개인 수행원에 해당하는 자제군관 자격으로 숙원이던 중국 여행을 떠났다.

박지원은 1780년(정조 4) 6월 25일 서울을 출발하여 북경·열하를 여행하고 10월 27일 귀국하였다. 이때의 견문을 정리해 쓴 책이 당시 문단에 큰 반향을 일으킨 『열하일기』이다, 당시 통념이었던 존명배청주의(尊明排淸)를 배격하고 청나라의 경제적 번영을 전달한 「열하일기」는 집권 사대부의 위선과 무능을 비판한 저술로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 박지원은 이 글에서 북벌론에 의해 오도된 조선의 대중국관을 비판하면서 선진 문물로 번영을 이루고 있는 청을 배워야 한다는 이른바 북학을 주장하였다. 새로운 문물을 표현하는 연암의 글은 성리학의 경전적고문(古文)이 아니라 이야기 소품(小品)체가 되었다. 열하일기가 내용과 문체에서 주목받자 조정에서는 새로운 문체가 성리학적 사유를 흔들어 놓을까하여 열하일기 등을 금서로 단좌하여 못읽게 없앴다.(이를 문체반정이라 한다.) 「열하일기」는 낙후된 경제 상태에서 벗어나 조선의 백성들을 빈곤으로부터 해방시키고 실학적 사상을 널리 펴고자 했던 박지원의 소망이 담긴 위대한 작품이라 하겠다.

 
 

박지원은 중국에서 돌아온 뒤인 1786년에 뒤늦게 음사(蔭仕)로 선공감감역에 제수되었고 면천군수, 양양부사를 끝으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박지원은 안의현감때 북경 여행의 경험을 토대로 실험적 작업을 시도했으며, 면천군수 시절의 경험을 살려 『과농소초 課農小抄』 · 『한민명전의限民名田議』 · 『안설按說』등을 남겼다. 이러한 저술들은 그가 추구하던 현실 개혁의 포부를 이론적으로 펼쳐 보인 작업의 하나이다.

그외 뛰어난 소설들, <허생전>·<예덕선생전 穢德先生傳> ·<광문자전 廣文者傳>· <마장전> ·<김신선전 金神仙傳>등은 18C 서울의 도시적 발달속에 나타나는 새로운 인간형을 그려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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